시간을 한 모금
삶의 장이 바뀌듯이 달달구리 커피도 나와 함께 성장했다. 대학 시절 시험 시즌이 되면 도서관 휴게실 제일 좋은 곳에 자리한 커피 자판기는 쉴 틈 없이 눌려대는 버튼에 응답하듯 끊이지 않는 기계작동 소리와 ‘딸깍’하는 종이컵 내려오는 소리로 분주했다. 대학교 로고가 박힌 종이컵 안에는 각성의 명약뿐만 아니라 직면한 시험에 대한 고민과 새롭게 도전하는 기대도 함께 담겨 있었다. 밤샘과 이른 기상으로 눈이 충혈된 학생들로 붐비는 자판기는 우리의 공통된 스트레스를 알아주는 말 없는 친구였다. 그뿐인가? 친구와 선배를 만나 데이트를 하거나 말 그대로 썸을 타던 설렘의 장소이기도 했다. 달달한 자판기 커피는 열정으로 들끓던 젊은 날을 함께 한 동반자였고 청춘의 설레는 가슴에 불을 지피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직장 생활에서 믹스 커피는 삶 자체였다. 출근해서 한 잔, 점심 식사 후에 한 잔, 그리고 힘들어서 한 잔. 이 정해진 의식은 어쩌면 조직 생활이 요구하는 질서와 구조에 순응해야만 하는 삶의 또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한 모금 속에는 동료와의 경쟁과 확실치 않은 업무성과 속에서 나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시간이 함께 있었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이 건강을 이유로 너도나도 원두커피로 갈아타는 광풍 속에서 달달구리 커피믹스를 멀리할 수 없는 나만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가끔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 혹은 너무 시끄러워 투명한 유리잔에 커피믹스 한 봉지를 털어 넣고 작고 앙증맞은 숟가락으로 천천히 원을 그려본다. 겹겹이 쌓이는 회오리 속에서 이제는 추억이 된 기억들과 내일을 위한 새로운 생각들이 마주하기도 한다. 지난날 익숙해진 단맛은 오래된 친구처럼 언제 불러내도 친숙하다. 삶 속에서 커피 한 모금은 희망의 가교가 되기도 하고, 불안한 미래의 걱정을 잠재우는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니 세상에 이만한 친구가 또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