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문 다시 읽기> 역사 속의 추석
2022년 9월 5일 아침에 포털 사이트에 뜬금없이 등장한 뉴스 하나를 발견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905086700005?input=1195m
명절이면 집에서 필자가 해왔던 전 부치기를 그만하라는 제목을 보고 일단 기쁨이 흘러넘쳤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 보고 나니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왜 이제야 간소화를 이야기하는가? 둘째, 치솟는 물가와 인플레이션에는 유생들도 어쩔 수 없구나. 짧은 소회다.
아무튼 이 기사를 읽고, 추석도 다가오는 마당에 옛날 신문 속에서 추석은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궁금해졌다. 옛날에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 대명절'이었을까? 당시 명절의 의미는 어땠을까? 다양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신문을 찾아보니 꽤 재미있는 주제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이번 글에서는 두 가지 재밌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볼까 한다.
데이터베이스에 '추석'을 검색했을 때 "추석이 뭘까요?"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이 나왔고, 추석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20년부터 합법적으로 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20년 3월과 4월에 각각 발행을 시작했다. 신문 속 추석 이야기는 1920년부터 출발한다. 1921년 9월 16일에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에는 추석 때 시골 풍경을 묘사한 글이 하나 있다.
시골로 말하면 집집마다 막걸리를 동이째 가져다 놓고 삼삼오오 모여 술이 취하도록 마신다. 씨름판을 벌여 큰 소 한 필씩 상을 주고, 베 한 필씩도 가져다준다. … 일 년 내내 농사지어 얻은 것을 하루아침에 다 잊어버리니 …
축제에는 역시 술이 빠질 수 없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이 당시에는 명절마다 노름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가져온 내용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당시 신문에서 조차 명절에는 노름이 빠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노름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즐길거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씨름이다.
씨름 대회는 각 지역마다 열렸다. 인기가 너무 좋아서 우승 상품의 규모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충남 공주에서 열린 추석 씨름대회 부상 표를 보면, 1등은 소 한 마리, 2등은 베 한 필을 줬다. 재밌는 점은 무려 소년부 우승만 해도 소 한 마리를 부상으로 줬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는 집안의 큰 재산이다. 이 재산을 얻기 위해 힘 좋다고 소문난 장사들이 전국 단위로 놀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정치깡패로 알려진 동대문파 이정재 역시 씨름으로 전국을 제패한 씨름왕 출신이기도 했다. 그는 고향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전국 씨름대회에서 소를 무려 10마리나 가져갔다는 썰이 있다...
1923년에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명절을 늘리자는 주장도 확인된다. 1923년 9월 26일 자 <동아일보> 사설에 이런 주장이 실렸다.
언젠가부터 명절이 풍성하지 못한데 이는 재앙이다. 국가적으로 명절 분위기를 내야 한다. 외국처럼 예수, 공자, 부처 등 탄신일을 기념하는 것이 좋겠다. 재미없고 삭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명절을 많이 가지는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일제강점기일 것이다. 도시는 물론이고 농촌에서도 일제의 침투가 가속화되었기 때문에 살기 팍팍한 심정을 대변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반대로 근대화에 물든 지식인 출신인 필자가 외국처럼 축제를 많이 열어보자고 주장한 것일 수도 있겠다. 사설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1920년대 사회가 가진 양면성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1930년대로 가면 팍팍한 일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토지를 빼앗긴 전 계층의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그 이하로까지 강등된다. 이걸 학술 용어로는 전층적 하강 분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지주들은 각종 공과금을 소작인에게 떠넘겼다. 농업사회의 주인인 농민이 설 자리를 잃자 농촌 사회도 냉랭해졌다. 냉랭한 농촌에서 열린 추석의 분위기는 1934년 9월 23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잘 나타난다.
(추석에) 이러한 재밌는 놀이를 하든 조선 농촌에는 근일 와서는 점점 그것이 적어 간다 하니, 이것도 아마 세대의 변천도 있겠지마는 점점 시들어가는 농촌의 궁핍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놀 때 잘 놀고, 일할 때 힘써 일합시다. 이리하여 시들어가는 농촌에 웃음소리 요란한 마음을 만듭시다.
해방 직후 명절의 풍경과 그 의미는 어땠을까? 먼저 해방 직후인 1946년의 기사를 보면, 풍족한 추석을 보낼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9월 10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옥수수를 배급받아 차례를 지냈다."는 짧은 기사가 나온다. 이는 미군정의 식량 배급 정책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남한에 입성한 미군은 곧바로 군정청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에 유일한 합법 정부는 '미군정'이라고 선포했다. 미군정은 모든 권한을 일임했는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식량 부문은 해방 직전 일본이 실시했던 것과 같이 배급제를 시행했다. 따라서 햇과일, 햇곡식이 나오는 추석이었지만 전혀 풍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나름 안정기를 찾아갔을 때 비로소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1955년 9월 30일 자 <동아일보>에서는 '국뽕'이 차오르는 각종 용어로 도배하여 추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당시의 감성을 재해석해보면 8월 15일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니 민족의 얼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과연 해방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선조의 묘소를 갈 때 이 얼마나 경건한 생활인가! 사람은 그 근본을 잊어버리고는 살 수 없다. 할아버지가 계시니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으니 자기가 있다. 이 거룩한 날은 배달민족이 갱생한 광복절과 비교하여 조금도 떨어짐이 없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에는 앞에서 언급한 성균관의 제사음식 간소화와 비슷한 흐름의 분위기였다. 1970년대 거시적 차원에서의 한국 경제는 성장 가도였을지 몰라도, 민간 경제의 사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에 여성단체를 시작으로 "명절 비용 줄이기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매일경제> 1971년 9월 30일 자 기사 "낭비 없는 추석"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을 넘어 '추석 가이드'를 제시하기까지 한다.
옛날에는 추석빔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요즘에는 큰 의미가 없다. 가정에서는 평상복을 깨끗이 빨아 입는 정도로 하여 분수에 맞게 명절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 (아동복을) 만약 마련할 때는 사치가 아닌 실용을 위주로 골라야 한다. 시장에 가면 바느질이 촌스럽고, 베이비 센터를 찾으면 가격이 만만치 않아 망설이는 어머니들이 많다. 그럴 때는 엄마가 손수 꼬까옷을 만들어 입히도록 한다.
사치가 아닌 실용을 위주로 옷을 고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만큼 현대에 와서는 명절 때마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기사 후반부 내용에서도 명절은 원래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아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받은 용돈을 군것질이 아닌 바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라 등 쓸데없는 지출을 막으라고 지적한다. 고물가 인플레이션이 닥친 2022년의 추석에 참고해볼 만한 내용이다.
명절에 빠질 수 없는 스토리는 바로 고부갈등.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불화다. 오죽하면 고추보다 시집살이가 더 맵다는 말이 있을까. 실제로 최근 이혼을 소재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고부갈등으로 이혼했다는 사례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최근 일만은 아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고부, 며느리 시어머니 등만 검색해보면 약 1천 건의 결과가 나온다. 모든 기사가 부정적이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고부간에 발생한 사건은 하나같이 비극적이고 살벌하다.
1927년 5월 10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가정불화와 고부의 관계"라는 제목의 기사가 연재되었다. 이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만하다. 그만큼 원인 분석이 말끔하게 잘 되어있다. 기자는 고부갈등의 근본적 원인이 대가족 제도에 있다고 지적한다. 자식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부모와 식구들 그리고 여기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 자연스럽게 시댁 식구 vs 며느리 구도가 형성되고, 숫자에 밀리는 며느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구조에 분노한 일부 며느리들은 결국 시어머니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였다. 이는 1925년부터 매년 1건씩 기사화되었다.
오늘의 주제인 추석을 주제로 한 고부갈등은 1950년대부터 기사가 확인된다.
아래 두 기사의 요약본을 먼저 소개한다.
작년 추석, (며느리는) 쌀이 없어 밥은 못하고 감자를 쪄 시어머니 OOO 씨에게 주었던 바. 시어머니는 "남들은 명절이라고 떡을 먹는데 왜 감자를 주느냐?"라고 화를 냈다. 그러자 며느리는 "늙은 것이 주는 것이나 잘 받어 먹지 않고 왜 밥투정이지?"라며 밥상을 때려 부수고 시어머니를 난타하였다. 드디어 시어머니는 4일 후 폐내 출혈과 뇌진탕으로 사망하였다. - <조선일보> 1950.03.17.
박 OO 씨는 본처의 상을 치르고 다시 얻은 과부 유 OO을 얻었다. 유 OO 씨는 시부모에게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심한 학대를 하게 되어 시부모가 분가시켰으나, 부부는 뜻이 맞지 않아 싸움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에 남편 박 씨는 아내에게 꼼짝 못 했고, "나가 죽어라"는 아내의 욕설과 앙탈을 참다못해 자살해버렸다. … 이후 며느리 유 OO 씨는 남편을 자살로 몰아넣은 그대로 시어머니를 볶기 시작했다. …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추석날 내쫓고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말았다. 이에 이웃사람들이 분노하여 며느리 유 씨 걸어 경찰서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고소했다. - <조선일보> 1959.10.08.
'사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기사의 양상은 다르다. 1번이 진정한 의미의 고부갈등으로, 며느리의 분노가 느껴지는 글이다. 반면 2번은 고부갈등보다는 그냥 악랄한 범죄 행위다. 추석이 아닌 날에 재산 강탈이 이루어졌으면 모르겠지만, 꼭 추석 당일을 골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필자의 레이더에 걸렸다.
1번 기사 속 며느리의 행동은 정당하지 못하지만, 심정은 왠지 공감이 간다.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던 며느리의 울분이 느껴진다. 그런 심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은 시어머니의 "감자를 주느냐?" 한 마디에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 서로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이 글을 작성한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과 관찰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없다.
가끔은 이렇게 결론이 없는 오락성 글도 읽고 쓰면 좋지 않을까.
옛날 추석 설명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