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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May 02. 2022

지하철 여행기

오늘도 출근하는 수많은 경기러를 위하여 건배


 오늘도  텔레파시는 통하지 않았다. 분명  사람에게 이번 역에서 내리지 않냐고 계속 신호를 보냈고,  사람도 분명 이전 역에서 어느 역인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으로 내게 ‘다음 역에서 내려요'라고 신호를   같았는데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팔짱을   야속하게 잠에 든다. 이봐요 언니,  내리려고 두리번거리시던  아니었나요?  갑자기 주무실 각을 잡으시는 건가요? 마스크 안으로 보이지 않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조금  단단히 서본다. 오늘도  채로 최소 50, 입석 표를 끊은 여행객이라고 스스로 되뇌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대중교통에서 보낸다는 경기러. 지하철 중에서도 시간표를 가장 잘 어기기로 유명한 1호선을 타고 출퇴근한다. 대학 시절 5년 동안 친구 만나랴, 학원 가랴, 인턴 하랴 서울에 그렇게 들락날락하며 경기러의 애환을 겪었는데,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 고통받았던 기억은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행복했던 기억만 남아 결국 이렇게 다시 또 대중교통의 지옥에 빠졌다.

 작년에 새롭게 나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이곳은 수원. 효자 정조의 발길이 여기저기 숨어있는 아름다운 화성행궁이 있는 도시이다. 수원 왕갈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모교도 있으며, 대한민국을 글로벌로 이끈 삼성전자도 본사를  대단한 도시.  베란다에서는 푸른 뒷산이 보이고, 주말에는 산책으로 화성 행궁길도 걸을  있다. 이전에 살았던 용산과는 사뭇 다른, 사람 사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정말 ‘살기 좋은 도시'이다. , 출퇴근길만 빼면.


 나의 출근은 집에서 화서역까지 걷는 과정으로 시작된다. 지도에서는 걷는 거리가 1.5km라고 표시되지만, 그간 스킬이 발달하여 남의 아파트를 가로지르고, 횡단보도의 타이밍을 계산해가며 1km까지 줄여 10 만에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화서역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해서 나의 걷기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경기도 오산. 1-1부터 가장 빠른 환승 칸인 9-3까지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렇게 겨우 걸음을 멈추고 지하철을 타면 드디어 지하철 여행이 시작된다.


 출근길 종착지인 회사는 서울역 근처. 지하철 앱에서 나오는 소요 시간은 58. 급행도 서지 않는 역이라 앞지르기 없이  정거장  정거장 꼬박꼬박 가야 한다. 앞지르기는 무슨. 1호선은 무궁화호와 같은 일반열차도 함께 운행하고,  멀리 인천에서 오는 열차와도 합쳐지기 때문에 항상 의도치 않게 배려의 미덕을 보여야 하는 노선이다.  ‘강제 배려 내가 타는 열차는  번도 제시간에 도착한 적이 없다. 적게는 6, 많게는 18분까지도 지연되어 나의 출근 시간은 항상 편차가 크다.


 가끔은  지연시간이 너무 싫어 금정역에서 앉을 기회를 포기하고 환승을 노리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이미 지하철에 너무 사람이 많아 금정역에서 앉을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고, 환승하면 서울역에서  걸어도 되기 때문에 오늘은 환승을 하기로 했다. 4호선 환승을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지하철 앱에서 나오는 1호선과 4호선의 금정역 실시간 상황을 확인하며 1호선과 4호선을 동시에 갈아탈  있는 확률을 빠르게 계산한다. 1호선과 4호선은 서로 친하기 때문에, 20~30 내외의 시간 차는 서로 환승할  있도록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오늘  열차의 시차는 대략 20. 1호선이  지연되지 않는다면 동시에 환승이 가능하다. 금정역에 도착할 무렵 반대쪽을 보니 연한 하늘색의 4호선이 나를 보고 웃는다. 고마운 4호선아. 나를 기다려 주었구나!


 금정역에서 4호선 환승하고 나면 가방을 올리고 본격적인 여행에 돌입하게 된다. 물론 1호선을 타고 쭉 가더라도 금정역에서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이때 앉느냐 앉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날의 컨디션에 꽤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나와 옆에 서 있는 사람과, 앞에 앉은 사람들과의 은근한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이 사람이 빨리 일어날까? 저 사람이 빨리 일어날까? 내 옆 사람 앞이 일어날까? 물론 인생은 항상 잘 풀리지만은 않아서, 야속하게도 내 앞사람만 일어나지 않는 마법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왜 항상 내 앞사람만은 내리지 않는지. 왜 들썩이고, 두리번거리며 역을 확인하는데도 내리지 않는 것인지. 회사 사람들에게 한탄하니 아직 앞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 세상에. 출근하는 것도 힘든데, 능력도 더 키워야 하다니. 아찔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경기라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것인 것을. 나는 경기도의 편안한 환경과 상대적으로 낮은 집값이 주는 여유를 출퇴근 시간으로  것이므로 누구도 탓할  없다. 요즘의 나는 앞으로   출퇴근길에 무엇을   있을까 생각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항상 얇은 책을   들고 다니며 책을 읽거나, 글쓰기를  글감을 생각하여 메모장에 정리하거나, 가계부를 쓰기도 하지만, 그저 유유히 이어폰을 꽂고 지하철  풍경을 보며 시간의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 생각보다 출퇴근길이 길어서   있는 일도 많지만, 그만큼 시간의 사치를 부리며 업무시간과 업무  시간을 충분히 분리할  있다는 장점도 깨닫게 되고 있는 요즘이다. (인스타를 보며 킬킬대는 것이 책을 읽는 것보다 재밌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게다가 가끔가다 운이 좋아 빨리 앉는 날은 이루 말할  없이 행복하고, 가끔  채로 햇살이 휘날리는 한강을 보는 순간 귀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건  그대로 찬란하게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 이런 순간들은 내가 경기러로 고통받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귀한 행복이다. 결국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나의 힘든 출근길은 결국 이런 좋은 순간들로 기억될 것이고, 언젠가의 나는 마치  일상이 여행이었다는  행복한 순간들로 승화하여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잘 살아 내보자. 덜컹대는 지하철 속에서 단단히 서보자. 오늘도 나는 여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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