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20억 강남 아파트의 현실

by 보건소

이사 나가는 날 가장 먼저 싱크대 철거가 이루어졌다. 기존 싱크대는 상부장과 하부장이 하나씩 있는 단출한 공간이어서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공간이 적었다. 가장 먼저 상부장문이 떼지고, 시트지로 덮여있는 미지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문가는 역시 전문가였다. 드라이버를 이용해 몇 번 돌리니 금방 상부장 싱크대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다 떼어낸 벽에는 4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나무 조각들이 벽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저것은 몇 년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그대로 있던 양,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상부장을 제거하니. 그리고 타일 위로 빼곡히 있던 빛나는 갈색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무스레 하면서도 갈색이면서도 가까이 가서 보니 바퀴벌레 알이 빈틈없이 빽빽이 붙어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화석이 된 자국도 있고, 제법 싱싱해 그 광택을 유지한 알도 있었다. 털 하나, 다리 하나, 너무 생생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 처음에 바퀴벌레 약들이 그렇게 발끝에 차였는지 한 번에 풀리는 광경이었다.

그 상태를 보고 신랑과 긴급회의를 진행했다. 집의 미관도 중요하지만, 바퀴벌레 군단의 공격에 이 집이 뚫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퀴벌레 군대의 방어가 제1순위, 그리고, 심미적인 부분은 2순위로 바뀌었다. 바퀴벌레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인테리어 기간 동안 철저히 해야 한다. 철거가 이루어진 그 날 밤 우리는 도둑처럼 우리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낮에 봐두었던 바퀴벌레들의 핫플레이도 찾았다. 발견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집주인의 시원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바퀴벌레의 사체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락스 큰 통을 다 써가며 부엌 벽에 화석처럼 붙어있던 바퀴벌레 알을 손으로 닦아냈다. 평소에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신랑도, 나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와 중에 관찰일기를 썼는데, 싱싱한 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바퀴벌레 군단이 기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을 막을 기회는 인테리어 기간 동안이므로, 우리는 서로 전의를 불태우며, 락스를 뿌려댔다. 그때 입었던 옷의 색깔이 누덕누덕 변한 것도 그때의 그 락스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바퀴벌레 사체와 알을 닦아내지 않는다면 이 지박령들은 그냥 새로운 싱크대로 감춰질 수도 있다. 물론 인테리어 하시는 분들이 잘 치워지시겠지만, 아쉬운 사람이 락스 청소를 하는 거다. 누런 기름때가 찌든 타일은 하얀색 시트지로 덮여있었고, 그나마도 너덜너덜했다. 신랑과 나는 펜치와 목장갑을 챙겨 들고, 시트지를 떼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듯, 시트지는 한 번에 잘 떼지는 법이 절대 없었다. 왜 이렇게 한밤중에 몰래 와서 이 난리를 치는가. 내가 만약 지금 떼지 않으면 그 시트지는 아파트 무너지는 순간까지 같이 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시트지를 떼고 나니, 선명한 기름기가 보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구멍과 벽틈새가 적나라히 드려다 보였다. 맨 처음 계획은 벽에 판을 대고, 최신 페인트 기법으로 하려 했으나, 집 상태를 확인 후 전면 계획이 수정되었다. 판을 대고, 페인트칠을 한다면 바퀴벌레에게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우리는 말도 없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닦았다. 오늘 닦지 않으면 내일은 다른 작업 위로, 덮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인테리어 팀은 낮에 공사를 진행하고,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밤에 인테리어를 해나갔다. 투 트렉으로 인테리어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간다.

말로만 낡았다 낡았다 들었지,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다. 들어가는 현관문부터, 녹슬었고, 각방의 문의 경첩도 휘어있는 게 보인다. 안방은 크기는 크지만, 안방에 딸린 화장실이 없다.

전에 살던 집에서 화장실이 하나였는데, 아침마다 전쟁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이 하나 더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안방과 연결된 화장실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안방의 창틀은 나무 창틀로, 그 역사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반질반질한 것이 창문은 스르륵 잘 닫힌다. 각방의 문지방에는 회색의 폼이 덧대져 있었는데, 단차를 낮추기 위한 역할인지, 발가락이 다치지 않게 안전을 위해 그랬는지, 그저 거뭇거뭇한 색감이 살아있다. 안방의 베란다를 자세히 보니, 버섯같은 거뭇거뭇한 과정 체의 무엇인가가 위쪽 창틀에 가득 차 있었다. 시멘트는 검게 갈라져 있었으며 특히 베란다 난간은, 최악이었다. 수 번의 이사를 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일까. 베란다 창틀은 휘고, 난간 기둥 하나하나는 썩어서 손으로 밀기만 하면 떨어질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베란다 난간을 잡고 놀기도 하는데, 이건 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베란다에도 역시 수많은 바퀴벌레약이 발끝에 차인다. 눈앞이 깜깜하다. 거실과 베란다를 구별 짓는 문은 초등학교 때 보던 나무 미닫이문이다. 40년 동안 사용했는지. 길이 잘 들여서 움직이긴 정말 잘 움직인다. 대신 바람이 불면 앞뒤로 덜컹덜컹한다. 문고리 하나, 장식품 하나 못 하나, 기나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베란다의 장판을 들어봐야 했다. 누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들면서, 괴생명체라도 나올까 봐 비명이 절로 나왔다. 더 이상 들추기를 꺼릴 때 신랑이 마저 장판을 들추었다. 다행히 누수는 없지만, 관리 안 된 바닥은 처참한 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방은 2개의 훤히 드러난 형광등은 방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었다. 붙박이장의 안쪽의 나무 서랍은 다 떨어지고 제습기가 여기저기 달려있었다. 장판은 옛스런 모습 그대로고 벽지는 낙서는 없었지만,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나무 창틀은 고풍스러운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화장실 옆의 작은 수납장은 그 활용도가 애매해서 완전히 허물어 작은방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또한, 부엌 쪽에 있던 다용도실도 허물어서 작은 방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공간을 좀 더 넓게 활용하고자 했다.

하하하

설명하고 나니 웃음만 나온다. 베란다 난간이 썩은 것은 처음 봤다. 손으로 '탁' 치니 저 멀리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그래서 더 이상 밀지 못했다. 우리에게 인테리어란 베란다 난간까지는 바꿔줘야 인테리어 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이런 어마어마한 공사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화장실은 이 집을 수리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수학 문제라면 족집게과외 선생님이 꼭 도와주어야 할 무거운 난제였다. 낡고 작은 화장실은 보기도 전부터 우리의 집중 걱정거리였다. 공중 화장실도 이보다는 나으리라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화장실을 살펴보았다. 빨간 작은 수납장은 수건이 10개 정도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익히 수압의 악명을 귀 따갑게 들어온 터라 조심히 수전을 들어 올린다. 다행히 찬물은 잘 나온다. 하지만 수전을 반대로 돌리니, 갑자기 물의 흐름이 뚝 끊기며, 쫄쫄거리기 시작한다. 온수의 수압은 거의 최악이었다. 너무 낮아서 여기서 과연 머리를 감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들이 커가고, 신랑의 강력한 주장하에 크지 않은 화장실이지만 두 개로 나누기로 한다. 안에 있던 욕조를 제거하고, 그 자리만큼 벽돌로 쌓아 안방 화장실로 만들 예정이다. 작은 화장실을 두 개로 나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화장실을 2개로 나눈 집을 볼 수 없으니, 스멀스멀 올라오는 우리의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냉수관은 최근에 교체해서 필터가 괜찮지만, 온수는 필터를 달지 않으면 노란색 녹물이 철철 나왔다. 그나마 수압도 낮아서 찔찔거리며 나온다. 냉수와 온수의 필터 색깔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집안에 들어오는 모든 물은 필터를 거쳐서 들어오도록 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완전히 철거된 집은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천정의 드러난 배관은 어지럽게 있었고, 알 수 없는 보따리가 천장 시멘트와 한 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4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담배꽁초가 천장의 시멘트와 섞여 있는 게 보였다. 저것을 보며, 그냥 같이 살아야 하는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집도 참 무궁한 역사가 있었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파트도 일생이 있다. 새 아파트에서 10년 차, 20년 차의 중견 아파트에서, 30년 차의 재건축기를 거쳐 다시금 새로운 아파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건물의 가격은 점점 낮아지고, 재건축기에서는 건물의 가치는 거의 없고, 땅값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파트는 매우 낡았지만, 그 미래의 가치를 보고 사람들은 재건축 아파트에 투자한다. 물론 이른 시일 내에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 녹물과 주차난을 온전히 몸으로 몇 년간 체험해야 비로소 저렴한 가격으로 새 아파트의 입성이 가능하다. 그마저도 변하는 정책 등 변수가 많다. 이제 나는 겨우 입성한 초보자이다. 이런 많은 사건을 잘 감당하며 지낼 수 있을지 가끔 나 자신도 궁금하다.

keyword
이전 08화8.  이런데 대체 누가 살아? 강남 아파트 직접살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