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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09. 2024

새미골 아이

<단편소설 2>

2.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터지는 가을이었다. 가시가 송송 달린 밤송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밤나무 이름이 왜 밤나문가. 밥이 열리는 나무라 해서 밥나무가 밤나무로 변했다니 믿거나 말거나. 그에 맞추어 할머니의 채근도 시작되었다. 새벽 여명이 희붐하게 밝아올 즈음이면 할머니는 ‘명도야, 일어나라. 염불 책은 담에 읽고 알밤 주 온나. 잠충아, 일어나래도.’ 할머니 등살에 못 이겨 일어났다. 염불 책 읽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날 새벽은 유독 밤 산에 가기 싫었다. 욕쟁이 산주가 지킬 것 같았다. 산주는 저자거리 대궐 같은 기와집에 산다. ‘야, 이 도둑 년놈들아 잽히기만 해 봐라. 뉘 집 손인지 내 다 안다.’ 알밤이 떨어질 때면 시시때때로 욕쟁이 산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산주는 새벽이면 가끔 순시를 나왔다. 재수가 없으면 딱 걸린다. 알밤 줍다 산주에게 잡히면 알밤은 압수당하고 볼기짝을 맞기도 하고, 볼떼기를 꼬집히며 괴롭힘을 당했다. 

 “할매! 가기 싫어. 그 할배 무서워.”

 “그 영감탱이가 괜히 괌만 질러 삿는 기다. 저절로 떨어진 밤인데 우떠까이.”


 그랬다. 그 시절 인심은 후했다.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베풀 줄 알았고 너그러웠다. 자기네 밤 산이지만 자연스레 떨어진 밤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였고 누구네 집 아이들이 다녀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 감아 주었다. 고함지르는 것은 생색내기고 엄포였다. 아이들이 그렇게 주워 모은 알밤은 항아리에 담겼다가 오일장에서 팔려나갔다. 가난한 가족의 일용할 양식이 됐다. 알밤벌이는 쏠쏠했다. 주인이 밤송이를 간짓대로 털어 수확을 끝냈을 때는 마음 놓고 알밤을 주우러 다녔다. 까치밥이란 명목으로 남겨진 감처럼. 아이들을 위해 남겨놓은 밤송이는 이웃에 대한 배려였고 인정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간밤에 바람도 많이 불었다. 퍼뜩 가래도? 이거 반만 차모 금세 온나.”

 할머니가 직접 만든 베주머니를 주셨다. 나는 베주머니를 들고 대밭을 지나 동네 뒷산으로 올라갔다. 양쪽 능선 아래 펑퍼짐한 평지였다. 언덕에 오르자 아래위동네 조무래기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새벽은 모든 것이 가라앉는 시간이고, 작은 말소리나 발자국 소리도 크게 들린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 알밤이 많이 떨어졌을 법한 곳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알밤은 사방천지 널렸다. 나는 알밤에 꽂혔다. 신나게 주웠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배주머니가 불룩해졌을 즈음이다. 


 “요년, 요 암쾡이 같은 년”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이 얼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 뒷덜미에 서늘한 것이 닿는가 싶더니 웃옷의 목 부분이 뒤로 확 당겨졌다. 나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마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아이들은 달아났다. 아이들은 할머니께 내가 욕쟁이할아버지에게 잡혔다는 것을 알렸다. 할머니는 댓바람에 산으로 올라왔고, 기절한 나를 안고 내려오던 욕쟁이 할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할머니는 욕쟁이 할아버지 품에서 나를 빼앗아 안았다. ‘명도야, 눈 떠 봐라. 명도야! 내다 할미다.’ 할머니는 마구잡이로 나를 흔들어댔다. 나는 죽은 척 했다. 할머니는 내 얼굴에 대고 ‘아이고 명도야, 눈 좀 떠 봐라.’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의 입 냄새가 어찌나 고약하던지.  


 “할매! 으앙~~~~ 귀 귀 귀신이......” 

 나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할머니는 나를 토닥거려 놓고 욕쟁이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삭주 이노옴, 이 대꼬챙이로 내 귀한 새끼 뒷덜미를 확 댕깃다 이 말이제? 개좆부리에 걸려 확 뒤질 놈아. 인자 좀 산다꼬 니 눈에 뵈는 기 없다 이거제?”

 “아이고, 누님, 야가 누님 손년 줄 몰랐습니더. 야가, 명돕니꺼?”

 “누님 소리 하들 말어. 니가 온제부터 부자 됐다고 목에 심주냐? 시방 내를 괄시하는 거냐? 니 미 시벌 잡넘아, 지맘대로 익어 떨어진 밤 좀 줍는 기 우때서. 칠성님이 보고 있다. 니 명줄 누가 좃노? 니가 시방 은혜를 원수로 갚는 기가?’


 욕은 할머니가 선수였다. 산주는 벌을 서는 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산주와 할머니는 아는 사이 같았다. 어쩐지 할머니가 그 산에서 줍는 밤은 괜찮다고 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머리 좋고 눈치 빠른 명도가 한 발 늦었다. 그 와중에도 알밤 주머니를 생각했다. 애써 주운 것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아니 억울하랴. 알밤 주머니는 할아버지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니를 누가 살려좃노. 반동분자로 몰린 니를. 그걸 모르모 니는 사람 새끼 아니다.” 

 “누님, 아가 듣습니더. 지가 잘못 했거마 예. 명도가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집에 가이소.”

 할아버지는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할머니는 퍼질러 앉아 있는 나를 돌아봤다.  

 “명도야, 인자 정신이 드나? 자 업히라.”

 나는 말짱하게 정신이 들었지만 할머니 등에 업혔다. 

 “자, 명도야, 이건 할배가 주는 선물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내미는 알밤 주머니를 냉큼 받아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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