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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20. 2024

새미골 아이

<단편소설. 끝>

6.


  다시 겨울이 왔다. 우리 동네 겨울 강은 축제장이나 다름없다. 물레방앗간의 아랫녘 소는 깊어 아이들 접근금지였다. 새끼줄이 길게 쳐지고, 새끼줄에는 하얀 헝겊이 끼어 나풀거렸다. 그곳을 제외한 도화 강은 대부분 꽁꽁 얼어붙었다. 지리산 자락의 추위는 혹독했다. 방학 때면 삼이웃 동네 아이들이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들고 강변으로 모였다. 강의 가장자리에서 각자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탔다. 아버지는 나무판자로 앙증맞은 스케이트를 만들어주셨다. 나무판자 밑의 양쪽 다리에는 굵은 철사가 박혀 있었다. 얼음을 찍어 밀고 다니는 나무막대 끝에 굵은 쇠못이 박혀 있었다. 못의 대가리를 망치로 뾰족하게 두들겨 송곳처럼 만든 것이었다. 

 

 “참, 애비라는 사람이 하는 거 보소.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가시나한테 스케이토가 머꼬? 얌전히 앉아서 길쌈이나 갈차야제. 명도야, 머스마들캉 강에만 가 봐라. 저녁은 없다.”

 “오메, 요새는 머스마, 가스나 분별없소. 가시나라꼬 머스마들한테 지는 꼴은 못 보요.”

 

 할머니는 아버지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수긍했다. 할머니는 전주 이 씨다. 할머니의 친정은 이성계 왕손의 후예란다. 할머니의 풍월 중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은 ‘뼈대 있는 가문의 여식이 중매쟁이에게 속아서 아무것도 없는 박 씨 가문에 시집을 와서 신세 조졌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허우대가 좋았단다. 키도 컸고 몸도 실해서 들돌을 휙휙 들고 놀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할머니의 표정은 복사꽃 같았다. 중매쟁이랑 삽짝에 들어서는 할아버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30대에 요절했다. 

 

 “살을 맞은 거라. 너거 할배는 초상집에 갔다가 살을 맞고 온 기라. 그리 정정하던 사람이 살박에 들어옴서 ‘아이고 머리가 와 이리 아푸노?’ 하더니 방에 들어가 누워 그 질로 간기라. 그 해, 구시골 조 영감 집 노망난 어메가 죽었제. 생이 메 달라는 바람에 갔다가 노친 네한테  끌리 간기라. 너거 할배가 워낙 힘도 좋고 인물이 출중 항께네. 데리고 간 기제. 얼라들 데꼬 내 혼자 우찌 살라고 그리 갔는지. 요새 겉으모 병원에라도 가봤을 낀데. 병원이 오데 있간디. 읍내 한약방에 데리고 갔지만 소용없더라. 초상집 가서 살 맞고 온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된다더라.”


 할머니는 긴 곰방대를 화로에 대고 탁탁 털었다. 늙어 쪼그라진 할머니의 몸피는 온통 체념하고 산 세월이 다닥다닥 붙었다. 할머니는 삼십 대 초반에 어린 남매를 데리고 청상과부가 되셨다. 할머니의 본성은 선하고 착했지만 남매를 데리고 혼자 살면서 억세고 거칠어졌다. 청상과부로 자식들 키우려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과부가 되면 동네 남정네부터 넘본다고 하지 않던가. 할머니는 밤마다 남매를 품고도 모자라 낫을 머리맡에 두고 잤단다. 


 “대동아전쟁 말기가 되자 일본순사들이 더 설치는 기라. 청년만이 아니라 처녀들도 공출을 하라데. 정신대라 카나. 일본 공장에 보낸다데. 돈 많이 벌게 해 준다고 꼬시는 기라. 댕기머리만 보모 잡아간다는 소문이 무성했제. 아랫말에서는 새미에 물 떠로 갔던 처니가 순사한테 끌려갔다고도 하고, 가난한 집 처녀는 부모를 들볶아 돈 몇 푼 쥐어주고 끌고 갔다고도 하는데 기가 차드라. 열다섯 살이 된 너거 고모를 문밖출입 시키기 무섭고 어디 숨칼데도 없던 차에 매파가 왔더라. 입석거리에 있는 호래비라는데 전처 자식도 없고 논밭도 서너 마지기 된다기에 보따리 싸서 덜렁 보냈다 아이가. 밥만 안 굶고 정신대 차출만 안 되면 장땡이라 생각했제. 그리 시집보낸 너거 고모가 육이오 동란에 당한 기라.”


 고모부가 빨치산을 따라 떠난 것이었다. 할머니는 고모만 생각하면 눈물콧물 바람이다. 

 “할매, 옴마는?”

 할머니의 눈물바람을 멈추게 만드는 것은 엄마의 이야기가 약이다. 치마를 뒤집어 콧물눈물을 닦다가도 ‘할매, 옴마는?’하면 금세 할머니의 눈이 파랗게 빛난다. ‘너거는 다리 밑에서 주다 할미가 키웠다 캤제?’ 서슬이 퍼렇다. 나는 늘 엄마가 그립다. 엄마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하다. 다른 아이들이 엄마를 찾을 때 나는 할머니를 찾았다. 엄마는 어디 갔을까. 고모처럼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경찰에게 총살당했을까. 언니들조차 엄마 이야기는 함구했다.  그러나 소문은 연기처럼 알게 모르게 퍼지는 것이다. 엄마는 내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다. 


7.


 새미골에도 봄이 왔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학교의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하얀 탱자 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경찰 아저씨에게 시집 간 큰 언니는 먼 바닷가에서 살고, 중학교를 졸업한 작은 언니도 공장으로 돈벌이 갔다. 아버지는 지리산 벌목꾼으로 떠나고 할머니와 나만 남았다. 외로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신학기라 그런지 학교도 친구들도 정이 안 붙어 허전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들 못 낳는다고 할머니께 쫓겨났다고도 하고, 외간남자랑 눈이 맞아 도망갔다고도 하고, 북괴군이 새미골을 점령했을 때 군인들 밥을 해 주다가 따라갔다는 설도 있었다. 전쟁은 끝났는데. 엄마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하교 길이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샘터 옆에 도착했을 즈음이다. 우리 집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담장 뒤에 우뚝 섰다. ‘누님, 명도 옴마 덕에 내가 살았는데. 날 봐서라도 인자 며느님을 용서해 주이소.’ 이어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이 육시럴 늠아, 나는 그런 며느리 들인 적 없다. 우리 애들도 저거 어미 없이 컸다. 존말 할 때 입 닥쳐라. 저거 애비 원수 갚는 다꼬 빨갱이 된 년이다. 젖멕이 가시나를 놔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모진 년이다. 잘 죽었다. 잘 죽었어.’ 할머니가 삽짝을 나왔다. 그 뒤를 허우대 멀쩡한 삭주 할아버지께서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샘터 섶 다리에 걸터앉은 나를 보고 허둥지둥했다. 


 “할매, 학교 다녀왔습니다.”

 나는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털며 쾌활하게 말했다. 

 “오냐, 우리 새끼 배 고푸제? 어여 들어가서 밥 묵자.”

 “명도가 많이 컸구나. 영판이네. 누님, 피는 못 속인 답디더.” 

 “아한테 실없는 소리 말고 퍼뜩 가라니까.”

 할머니는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열녀문을 생각했다. 거기 엄마의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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