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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28. 2024

밥그릇 두 개가 부딪히면

밥그릇 두 개가 부딪히면 


    

 아침 식탁에서 밥그릇 두 개가 부딪혔다. 부딪힐 것도 없는데 왜 부딪혔을까. 내가 의도했던 것은 전혀 아니지만 말 한마디에 각자 소설을 쓴다. 그것도 몇 초 안 걸리는 찰나에 머릿속에 그림 한 장이 제대로 그려진다는 거다. 평소 밥그릇 두 개는 생각을 담는 차이가 다르다. 각자의 그릇 크기를 바꾸지 못하고 사십여 년을 산다. 모양도 색깔도 크기도 다른 그릇 두 개가 만났으니 일찌감치 깨져야 정답인데 안 깨어진 것이 수수께끼다.

 

 그릇이 깨질 만큼 강하게 부딪힌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다행스럽게 깨지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한 순간 금이 갈 수도 있고, 왕창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다룬다. 밥그릇 두 개가 부딪혀 깨지면 재산상의 손실보다 정신적 손실이 더 크다. 설거지를 할 때도 밥그릇 두 개가 부딪히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룬다. 가끔 멀찍이 떼어놓기도 한다. 그렇게 사십여 년을 살고 있다. 확 깨버리고 싶을 때마다 밥그릇을 들고 눈높이를 맞춘다. 오랫동안 쓴 밥그릇에 식상했다면 깨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헌 밥그릇을 깨 버리고 새 밥그릇을 사는 것도 방법이다. 


 문제는 새 밥그릇도 몇 년 쓰면 헌 밥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티가 남을 수 있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질 수도 있고, 마음에서 멀어지면 눈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마음과 눈에서 멀어진다고 밥그릇을 깨어버릴 수는 없다. 밥그릇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금이 가도 무심히 쓸 수 있을 만큼 정이 들어서 그런가. 무정도 정이다. 미움도 정이다. 알게 모르게 쌓인 것들이 그릇 하나에 녹아있다. 헌 밥그릇도 잘 다루면 골동품으로 가치가 생긴다. 오래 쓴 밥그릇에 연륜이 깃든다. 밥그릇 두 개에 나이테가 감기면 모서리도 닳아지고 때도 낀다. 


 나는 부딪힌 밥그릇을 무심하게 설거지통에 담갔다. 밥그릇에 금이 갔을 수도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 살피기도 하고 무심히 넘어가기도 한다. 나이 듦이란 이래서 좋은 거다. 노인의 길에 접어드니 좋은 점이 있다. 금이 간 그릇은 깨어질 때까지 쓰면 된다는 거다. 쓰다가 깨어지면 버리면 된다는 거다. 새 그릇을 사고, 새 밥을 짓는 것도 젊은 기운일 때 이야기다. 말다툼 몇 마디로 깨어질 밥그릇이라면 진작 깨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직 깨어지지 않은 밥그릇 두 개는 전생의 인연이 업 갚음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막상막하인 두 사람이 여태 같이 사는 것이 참 신기하네요.

 가운데 앉은 딸이 한 마디 보탠다. 

 그러게 말이다. 

 피식 웃고 말았다. 

 

 딸은 시댁 청소를 떠나고 농부는 감산으로 갔다. 나는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았다. 78년을 함께 산 시부모님을 생각한다. 밥그릇 두 개 중 한 개는 금이 많이 갔었다. 금 간 밥그릇이 먼저 깨질 줄 알았더니 금 안 간 밥그릇이 먼저 망가졌다. 두 밥그릇 중 하나가 먼저 금이 갔고, 물이 샜다. 때도 끼었지만 금 안 간 밥그릇이 먼저 깨졌다. 어머님은 당신 소원대로 시아버님보다 일 년 더 살고 떠나셨다. 비록 요양원에서 일 년이지만. 

 

 우리 집 밥그릇 두 개, 이러다 내 밥그릇이 먼저 금이 가거나 깨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망가지는 것은 순간이다. 정신 줄 놓고 살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 시아버님처럼 구는 농부를 보며 시어머님이 왜 말문을 닫고 살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도 시어머님처럼 말하기가 싫어 외면하기 일쑤다. ‘그래,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관심 끊자.’ 그런 심사다. 농부가 생전의 시아버님 같을 때 ‘별 수 없지. 배운 도둑질 어디 가나. 피는 못 속이지.’ 남의 일처럼 무심해지기를 연습한다. 

   202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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