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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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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15. 2024

건 고추 만들기

 건 고추 만들기   

  

 장마라는 이름을 달고 달포가 넘게 비가 잦았다. 텃밭의 고추가 붉어 가는데 어떻게 말리나. 고추가 익어가는 것을 보면서 폭염과 비로 습한 마당이 불만이었다. 농부는 서너 번 따서 저장고에 넣어 놨다가 건조기에 돌리자고 했지만 생물을 저장고에 오래 두는 것도 불안했다. 그늘에 널어 시들어진 붉은 고추를 햇볕에 널어놓고 검은 그물망을 씌우고 비지땀을 흘리자 농부는 텃밭 가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지어 주었다. 뚝딱뚝딱 솜씨 꾼 농부다. 


 칠월 말이 되자 겨우 장마가 끝났는지 햇살이 눈부시다. 어찌나 좋은지 건조기에 넣겠다던 마음은 싹 도망가 버리고 붉은 고추를 햇볕에 내 널기 바쁘다. 농부는 일을 만들어 고생한다고 퉁을 준다. 일은 내가 만들고 고생은 자기가 한다고 불만이다. 어쩌랴. 타고난 팔 잔 걸. 첫물 고추를 말려 들이고 두 번째 딴 고추를 널었다. 세 번째 딴 것은 씻어서 시들 키는 중이다. 우리 양념할 정도만 거두면 된다. 하얀 벌레가 고춧대를 점령했다. 진액을 빨아먹자 줄기와 잎사귀가 시든다. ‘야들아, 정도껏 먹어라. 같이 먹고살자.’며 벌레를 툭툭 턴다.


 사방이 풀밭이다. 땅의 습기가 마르려면 입추가 지나야 하지 않을까. 입추가 지나면 바람의 맛이 달라진다. 이삼일 그늘에서 시든 고추를 햇볕에 바로 내 널어도 희나리 질 일이 없다. 붉은 고추가 투명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느낀다.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집안에 들어온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고 거두어 풀밭으로 날려 보내는 것도 자연의 숨결에 젖어 살아가는 덕이 아닐까. 


 고추를 손봐 놓고 텃밭을 바라본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토마토와 가지, 오이를 두세 개씩 땄다. 오이넝쿨이 수명을 다해 간다. 잎사귀는 싱싱함을 잃어 가는데 줄기에 달린 오이는 하루가 다르게 굵어진다. 미안한 마음이다. 식물은 농부의 정성만큼 아낌없이 주고 가는 고마운 것들이다. 변덕스러운 사람의 입맛이 문제다. 아무리 무공해 친환경이라 해도, 채식이 몸에 좋다 해도, 똑같은 반찬을 날마다 먹으면 식상하다. 첫물은 뭐든지 맛있다며 식탁에 올리던 것도 나중에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참매미 소리 싱그럽다. 아침부터 땀 목욕을 해도 햇볕이 좋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을 흥얼거린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를 달달 외우던 소녀 시절을 떠올린다. 청소년 시절 암송한 시는 평생을 가는 모양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소녀시절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서 정주 시인은 친일파 문인으로 비판받는다. 타고난 시인이지만 인품까지 시적이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화사』 같은 그의 시는 좋다.      


 <수확> 

    

 붉은 고추 따던 손

 이마의 땀을 닦았더니

 눈시울이 따갑다.


 어쩌자고 나는 

 흥얼흥얼

 옛 시를 읊조릴까. 

    

 붉은 고추 따던 손

 목덜미 무는 모기 잡았더니

 간질간질 따끔따끔하다.     


 어쩌자고 나는

 고추이파리 물고 

 휘파람을 불까.


 붉은 고추 따던 손

 소쿠리 그득 찬 고추 

 물에 씻는다.     


 어쩌자고 나는

 실한 고추 하나 

 깨물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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