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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04. 2024

인연, 굴레를 벗다

<장편 소설 1-2>

 아침나절이었다.

 나는 다시 거실에서 멍청하게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참 청명한 날이야. 딱 죽기 좋은 날이군. 아니지. 여편네가 이렇게 좋은 햇살을 보면 대청소하기 좋은 날이라고 해야 격에 맞지. 그래 대청소하기 딱 좋은 날이군. 어머! 저 매화 좀 봐 푸르스름한 가지에 눈꽃처럼 달렸네. 참 곱기도 해라. 누군가 그랬지. 녹차에 매화꽃잎 띄워 마셔보라고. 향이 기가 막히게 좋다고. 그래 나도 그래 봐야지. 녹차에 저 꽃잎 하나 띄워 향기를 음미해 보는 것도 제법 운치 있겠어. 참 홀가분하고 상쾌하다. 탁 털어버리면 이렇게 좋은 걸. 진짜 좋다. 바람난 여편네 마냥 좋아. 이 좋은 느낌 참 오랜만이다. 날마다 이런 기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어서 끝내고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져야지. 때론 혼자라는 것이 이렇게 살맛 나는 걸.’  

 생각을 탁 접고 발딱 일어난 나는 가벼운 통바지와 티 차림으로 대청소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벗어놓은 빨래 감과 남편의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집어넣어 버튼을 누른 후,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거실의 유리문 틈과 천정 모서리에 붙은 거미줄을 걷어내고 걸레질을 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청소에 신들린 여자처럼 닦고 또 닦아냈다. 

 ‘무슨 먼지가 이리도 먼지가 많을까. 닦고 또 닦아도 가득 고여 있네. 풀풀 날리는 저 먼지들 좀 봐.’

 혼자 중얼거리다  멍하니 서서 창밖의 매화나무에 넋을 놓곤 한다.

 나는 세 개의 방과 넓은 마루를 쓸고 닦은 뒤 북쪽의 닫힌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낡은 책과 신문, 잡지, 쓰지 않는 가재도구 등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어유 이 먼지, 너무 오래 이 방을 묵혔나 봐.’

 나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신문과 잡지를 정리하다가 오래된 잡지들을 쌓아 올린 구석에서 먼지를 뽀얗게 덮어쓴 라면 박스 한 개를 찾아냈다. 한동안 그 라면 박스를 소중하게 쓰다듬다가 연필깎이 칼을 가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밀봉된 박스를 뜯었다. 뚜껑이 열린 박스 안에는 누렇게 변색된 원고지들과 엽서와 쪽지, 편지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그것들을 들추어 보기 시작했다. 편지나 쪽지를 꺼내어 읽으며 싱그레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다가 전기에 감전당한 듯이 두 손을 가슴에 붙였다.

 ‘세상에, 이것이 여기 있었네.’

 나는 두툼한 공책 한 권을 꺼내어 손바닥으로 먼지를 훔쳐 가슴에 품었다. 코끝이 시큼해졌다. 공책을 잡은 손등에 푸른 혈관이 파르르 떨었다. 나의 젊음이 고스란히 담긴 그 일기장이었다. 

 나는 허벅지 위에 일기장을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첫 장을 펼쳤다.


 갈라진 벽

 틈새로 작은 꽃 한 송이

 잡아 뽑아 보았네.     

 여기, 내 손안에 그대가 들려있네

 뿌리와 그대의 모든 것이.     

 작은 꽃 한 송이

 하지만 나는 알 수가 없네.     

 그대는 대체 무엇인가?

 뿌리와 모든 것, 그 모든 것 속의 모든 것.     

 정녕 그대가 무언지 알 수 있다면,

 인간이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겠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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