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잎을 보지 못하지만
굵은 빗방울과 비구름에 감싸인 집은 새소리도 묻혔다. 딸은 단체명상을 가고 농부는 명상 방에 들었다. 혼자 남은 나는 『벽틈 사이로 빛이』김애자 선생님의 수필집 마지막 장을 덮었다. 수필의 진수를 읽은 것 같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면서 배울 게 많은 수필이었다. 아껴 읽고 싶어 읽은 수필을 또 읽었다. 눈에 비문이 생기고 피곤해지면 책 읽기가 힘들다. 유발 노아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데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기 일쑤였다. 틈새에 잡은『벽틈 사이로 빛이』에 빠져들 수 있었으니 아니 좋으랴.
빗방울이 굵다. 마당가 소나무 아래 핀 주황빛 상사화가 곱다. 푸른 차나무와 잡초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꽃이다. 서너 포기뿐이다. 적어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백양사 근처에서 발견된 꽃이라 해서 백양화라 불린다든가. ‘가을에 무슨 원추리가 꽃을 피웠어? 꽃들도 정신을 못 차리나 봐.’ 군담하고 지나치다가 하루는 자세히 봤다. 원추리 꽃과 비슷한 것 같은데 달랐다. 어디서 왔을까. 원추리 꽃과 함께 야생에서 왔을까. 어떻게 우리 집 마당가에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꽃은 꽃무릇이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꽃빛에 반해 구월 이맘때면 군락지를 찾아 꽃구경을 다녀오곤 했었다.
꽃무릇하면 운문사 말사인 사리암이 떠오른다. 젊을 때다. 운문사를 거쳐 사리암을 올랐다.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헉헉대며 오르다가 길 양쪽에 기립한 꽃불을 만났었다. 그때는 꽃 이름도 몰랐다. ‘무슨 저런 꽃이 있어? 불꽃이네. 사리 암 스님들 타는 마음 같아.’ 어쩐지 애잔하기도 했다. 불꽃같은 꽃이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서늘한 꽃, 가느다란 꽃술을 달고 있는 꽃, 그때 ‘오느라고 고생하셨어요.’ 산문 앞에서 맑고 깊은 눈빛으로 일행을 맞이하던 여승의 눈빛 같은 꽃이었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 산문에 든 불자를 인도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차고 시원한 물이었다. 일단 땀내 절은 몸과 옷을 갈아입고 부처님 전에 나아가야 했었다.
마당가에 있는 꽃무릇은 아직 피어날 기미가 없다. 대나무 숲 사이에서 피는 붉디붉은 상사화 과의 석산, 혹은 꽃무릇은 화려하다. 때가 되면 피겠지. 함양 상림 숲의 화려한 개화를 생각한다. 꽃무릇이 피었을까. 조만간 다녀와야겠다. 꽃은 여심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여심을 잃고 싶지 않은가보다. 꽃의 화려한 운무를 보고 싶다. 젊은 날은 별 느낌 없이 꽃이 참 곱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꽃을 보면 젊은 날을 떠올린다. 나도 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날 때가 있었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이었던 적이 있었지.
우리 집 꽃은 동네보다 한참 늦다. 기다림을 배운다. 꽃무릇보다 먼저 피는 분홍빛 상사화는 진지 오래 되었다. 담장 아래 꽃대만 멀거니 서 있다. 꽃무릇에 비해 상사화는 꽃 모양새가 밋밋하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하는 매화랑 같다. 올해는 상사화와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못 피웠다. 집 밖을 나가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가을날씨가 한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꽃을 찾았을 때는 이미 시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잊지는 않았는데 쓰다듬어주진 못했구나.’ 하루에 한두 번은 삽짝을 드나들었지만 꽃이 피어 있는 것조차 몰랐던 것이다. 미안하고 안타까웠는데 생각지도 못한 주황빛 상사화와 만나게 된 것이다.
개화는 잠깐이다. 사람의 일생도 잠깐이다. 천년만년 살 것 같아도 길어봤자 겨우 백 년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 때가 됐다. ‘짧고 굵게 살자.’ 여고시절 내 좌우명이었다.
그때 단짝 네 명이 있었다. 셋은 문학소녀였고 한 명은 사회에서 만난 친구였다. 한 친구는 소설 지망생이었고, 한 친구는 화가 지망생이었고, 한 친구는 시인 지망생이었다. 우리는 짧고 굵게 살자는 좌우명을 정했었다. 좌우명처럼 이십 대에 먼저 간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친구, 남은 세 친구 중 한 친구는 요양병원을 오가며 산다. 나 역시 촌부로, 글쟁이로, 기저질환자로 조심스럽게 산다. 한 친구만 일선에서 돈벌이를 하며 그림을 그린다. 아직 할머니 소리를 듣기 싫다는 마음이 젊은 친구다. 홍옥 같은 내 친구, 내게 그 친구는 수필집『벽틈 사이로 빛이』에 나오는 한 줄기 빛 같다.
친구가 보고 싶다. 가까이 있으면 달려갈 텐데. 천리 길이다. 전화를 건다.
바쁜 시간인가? 주위가 소란스럽네.
응, 꼬마가 유치원 마치고 오는 길이라서. 나중에 전화할게.
그래, 목소리 들어서 됐다. 건강 챙기며 잘 지내.
나는 전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함초롬히 비를 맞고 있는 주황빛 상사화를 바라본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지만 잎은 꽃을 피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