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끝>
암튼 그 일이 있은 후 수리엄마는 가게를 접고 떠나고 나는 터를 잡았다. 한동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대순가. 나도 먹고 살아야 하고, 건사할 가족이 있는데 억척스럽지 않으면 시장바닥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겠나.
나는 살아냈다. 막내가 국비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이 결정되어 대학을 졸업하는 날 나는 펑펑 울었다. ‘엄마, 고생 많았어. 고마워.’ 막내는 학사모를 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는 학사모를 쓴 내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 속 나는 수줍게 웃고 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뽀글뽀글 볶은 파마머리에 시장에서 산 개량한복을 입었다. 도시물 먹고 살아도 세련됨과 거리가 먼 나는 영락없이 촌티가 나지만 참 좋았다.
“야들아, 내 영정사진은 이것으로 해라.”
나는 그 사진을 액자에 넣어 화장대 위에 놓으며 유언 아닌 유언을 했다.
“당신 고생했소. 영정사진도 걸었응께 인자 우리 유람도 댕기고 부처님 뵈러 절에도 자주 갑시다. 오지랖 넓은 거 보모 당신은 절에 안 댕기도 내한테는 보살님인데 절에 댕기모 도사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는 나를 웃겼다.
불과 몇 해 전 일이다. 말이 씨가 된 것은 아닐까. 내 영정사진 대신 그의 영정사진을 놓았다면 내가 먼저 북망산 갈 채비를 했을까. 꿈은 반대라는데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부처님은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데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부처를 만난다는데. 내가 그를 부처로 보면 그의 죽음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처님 도와주세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다산마을 소원사 부처님을 생각했다.
아들과 그는 동네 의사가 써 준 의뢰서를 들고 서울의 대학병원에 갔었다. 마침 서울대학병원 원무과에 이종조카가 있었다. 조카의 도움을 받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췌장암 말기였다. 수술요법도 있고, 방사선요법도 있지만 그에게는 해당 사항 없었다. 의사는 환자가족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않았다. 무 자르듯 싹둑 잘랐다.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이미 여기저기 전이 된 상태라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앞으로 살날은 길어봤자 3개월입니다. 집에 모시고 가셔서 환자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모시는 것이 환자의 마지막을 돕는 일입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사방팔방 암에 좋다는 약이나 암 치료 전문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민간요법도 시행했다. 우리 집은 온통 한약 달이는 냄새로 가득 찼다. 우선 살고 봐야지. 죽게 됐는데 여행이 무슨 소용이겠나. 유럽여행도 포기했다. 자의 반 타의 반 그는 내게 끌려 다녔다. 암 전문이라는 유명한 병원, 유명한 한의원을 전전했지만 소용없었다. 노후자금으로 꿍쳐뒀던 통장도 바닥났다.
“그만해라.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내 죽고 나모 애들한테 손 벌리 끼가?”
결국 희망을 포기했다. 병원에서 진통제 처방만 받았다. 진통제도 소용없어질 때가 온단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복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는 잠에 가기를 소원하던 노인도 잠자듯이 곱게 죽기 어렵다. 죽을 복을 타고 나야 그런 죽음도 맞이한다는데. 이런 저런 불치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는 통할 수 없는 일이다. 상실감이 더 컸다. 시한부 인생이 된 그를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의 마지막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주야장창 부처님을 불렀다. 사는 데 찌들어 살 때는 신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죽음이 확정된 마당이라 나는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조왕신이든 신이 절실했다.
의사가 내린 시한 부 3개월이 흘렀다. 그는 죽지 않았다. 미이라처럼 뼈만 남았지만 정신도 맑고 의사표현도 확실했고 내가 부축해서 화장실도 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 유언을 했다. 정신이 맑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해 놔야 편안하게 떠날 수 있다고 했다.
“부부 연도 자식연도 인연 줄이다. 너희들도 더 이상 나 때문에 애달 복달하지 마라. 죽음은 정해진 수순을 밟아가는 길이다. 부모가 떠난 자리는 자식이 이어가는 거다. 나는 한 평생 잘 살았다. 내 아들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 내가 의사말보다 오래 사는 것도 너의 옴마 덕일 게다. 내 죽고 나모 너거 옴마한테 잘 해라.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나는 환생하고 싶지 않다. 인연의 줄을 끊어야 해탈한단다. 나는 해탈까지는 안 바라도 환생하긴 싫구나.”
그의 말은 진실했다.
신기하게도 그의 유언을 듣자 나는 미친 듯이 소원사 부처님이 보고 싶었다. 아직 엄마의 위패가 명부전에 있을까.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었다. 엄마의 영혼이 그를 인도할 것이고, 내 바람대로 엄마가 그의 마지막을 고통 없이 평화롭게 인도해 줄 것만 같았다. 기도발이 센 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원사, 기억나요? 처녀 때 이모랑 댕기던 절인데. 당신이랑 갔던 적도 있잖아. 지극정성이면 소원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는 절인데. 거기 다녀오자. 당신도 고향을 그리워하잖아. 먼발치에서 고향만 둘러보고 와도 좋잖아. 열이랑 다녀오자.”
그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저승에 계신 부모님 뵐 면목이 없다. 당신이나 다녀오람.”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마음도 백% 이해하고도 남기에 나는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이모 손에 맡겨졌던 나는 이모를 따라 소원사에 다녔다. 이모가 다니던 동네 뒷산의 작은 암자였다. 이모는 나를 생각해서 요절한 내 엄마의 위패도 그 절에 모셨다고 했다. 엄마의 위패를 모셨다는 이모의 말을 믿어서라기보다 솔직히 나는 동짓날은 팥죽을 먹기 위해 절에 갔고, 초파일날은 비빔밥을 먹기 위해 절에 갔다. 동지팥죽도 비빔밥도 절에서 주는 것은 뭐든지 맛있었다. 후딱 먹어치운 빈 그릇을 또 내밀곤 해서 이모의 눈치를 받았었다.
1950년 대 쌀 한 톨 귀했던 가난했던 시절, 농촌사람은 대부분 구복신앙인이었다. 부처님을 믿어서라기보다 각자 마음의 의지 처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믿고 의지하면 복을 준다는 구복신앙, 이모도 부처님의 가피를 빌었을 것이다. 내게 엄마 대신 엄마 노릇을 해야 했던 이모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웃에 사는 당신의 시부모님과 이모부 눈치를 안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알부자로 소문났지만 친정붙이 군식구 입이 하나 더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했겠나. 아무리 엄마와의 약속이라지만. 나도 한 고집 했던 터라 이모 속도 무던히 태웠지 싶다. 오죽하면 어린 소년에게 시집을 보냈겠나. 이모 집을 떠나면서 소원사도 멀어졌었다.
그가 잠든 사이 아들과 함께 소원사로 향했다. 부처님을 뵈었다.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라.’ 부처님의 마음이 전해왔다. 스님께 그를 위해 백일기도를 부탁했다. 몇 주가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르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마음의 짐 다 내려놓고 편안하기를 빌어달라고 했다. 죽음 앞에 돈이 무슨 소용인가. 그가 살아있는 동안 편안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나. 내 곁에 머무는 시간이 소중한 것을.
그리고 매월 초하룻날 나는 아들과 함께 조용히 소원사를 다녀온다.
햇살 좋은 날 아들이 전화를 했다.
“엄마,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왔네. 어떻게 하지?”
“다른 분 받으라고 해라.”
나는 그를 호스피스 병동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석 달이 지나가는 중이다.
그는 유언을 한 후 조용히 자리보전만 한다. 의사표현도 거의 하지 않는다.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천국을 노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는 이제 통증도 느끼지도 못한다. 의식도 없다. 빨대로 한 모금 넘기던 물조차 넘기지 못한다. 거즈에 물을 적셔 살짝 벌어진 입술에 물린다. 나는 그의 등에 손을 넣어본다. 욕창방지 패드가 눅눅하다. 아들이 오면 갈아줄 것이다. 그의 옆에 누워 그의 손을 잡고 잠을 청한다. 나도 이제 편안하다. 그가 떠날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따름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과 깨달음의 실천에 있다고 하던가. 그의 얼굴이 부처님 같다.
그날도 나는 그의 옆에 누워 그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당신 먼저 가서 기다리면 나도 곧 따라가리라. 당신을 만난 건 내게 행운이었어. 고마워요. 그래도 우리 다음 생에는 부디 환생하지 맙시다. 극락에서 놉시다.’ 그의 손가락에 미세하게 힘이 주어진다. 나는 그 손가락을 꼭 잡았다. 마주잡았던 미세한 힘줄기가 조금씩 풀어진다. 그의 손을 놓았다. 툭 떨어진다. 가슴에 손을 댔다. 뼈만 앙상한 가슴에도 미동이 없다. 콧구멍에 손을 댔다. 숨결이 없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지 않고 내 곁에서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전화를 한다.
“아버지 떠나셨다.”
소원사에 기도를 올린 지 꼭 백일 되는 날 아침나절이었다.
부처님 곁에 그를 모셨다.
사진 속에 앉은 그의 미소가 부드럽다.
은은한 향이 그를 감싼다.
부디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소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