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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Oct 25. 2024

그러다 대치동으로 下

어느 삼수생의 회고록 10

지도 앱에서 찾아준 정류장까지 가는 데에는 한 15분에서 20분 정도가 걸렸다. 내려서 시대 신관을 찾았다. 지도에 뜬 위치로 갔는데,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한다던 강대에 비해 규모는 작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화살표를 따라서 OT 장소로 올라가긴 했다.


중간에 일종의 출석 체크를 하는 곳이 있었다. 이름을 말했는데 명단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원서 접수를 마지막 날에 해서 누락된 것 같다고 하자, OT 안내 문자를 보여주고 OT 안내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바로 강의실로 들어가서 자리를 찾았다.


내가 인강에서 얼핏 본, 사람들이 막 200명 넘게 차 있을 것 같은 그런 강의실이었다. 나는 일부러 뒷줄로 갔다. 난방을 세게 틀었는지 생각보다 더워서 입고 온 패딩을 벗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 한 80%가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다. 나머지 20% 중에서 80%, 그러니까 전체의 16%는 또 흰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이곳이 재수생들의 공간이라는 점을 딱 알려주듯이.


곧 강의실 앞에 걸린 스크린에서 OT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되기 전에 아까 받았던 자료를 살펴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벌점 규정이었다. 별게 다 벌점 대상이었다. 그중엔 당연히 지각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벌점을 많이 주는 항목이 무엇인지 보니, 딱 봐도 좀 위험한 행동들이었다.


벌점 관련 규정이야 이미 책자로 훑어봤으니 따로 설명이 나올 때는 대충 흘려들었다. 그다음으로 중요해 보이는 것은 자리 배정이었다. OT 진행자는 부엉이 라이브러리의 구조를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해 주며, 자리를 신청하라는 문자가 도착하면 바로바로 원하는 데를 찍어 놓으라고 했다. 그 외에는 별거 없었다. 대충 불량한 짓 안 하면서 예의만 잘 지키면 문제는 없을 듯했다.


OT가 끝난 게 한 3시쯤이었다. 일찍 집에서 나오느라 점심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 근처(그쪽을 은마사거리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 반수 하면서 알았다)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갔다. 단품으로 버거를 시켜 먹다가 교정기에 입 안쪽 살이 껴서 불편했다. 교정 치과에 연락해서 점검받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교정기에 대한 슬픈 사연을 떠올렸다.




내가 처음 교정을 했던 것은 중학생 때였다. 한 2년 좀 넘게 교정기를 달고 있다가, 이후에는 유지 장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기 검진 도중 재교정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재수할 시점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재교정은 수능 끝나고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치과 예약을 수능 발 다음 날에 잡았고 그날 교정기를 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삼수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교정기를 달고 살면 여러 불편함이 생긴다. 예를 들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단순히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고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생겨 버리기도 한다. 이에 달라붙는 음식이나 색깔이 있는 카레 같은 것 말이다.


어쨌거나 N수를 염두에 둔 사람이 절대 시작해선 안 될 일 중 하나가 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원서 영역을 망치지만 않았다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참사. 하지만 이미 붙인 교정기를 뗄 수도 없었다. 그냥 참는 게 유일한 답이었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햄버거 하나로 때운 뒤에 버스를 타고 강남역으로 갔다. 시대 구경은 조금 전에 했으니 이번에는 강대가 있는 곳을 들렀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거리도 가까웠기에 한번 그쪽을 찍고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내부는 못 보고 왔지만 강대도 꽤 괜찮은 선택지 같았다. 무엇보다도 환승 없이 바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학사라는 대안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니 차라리 편도로 90분씩 걸리는 거리를 통학하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평이 별로였다. 결국 두 학원 중 어디를 다닐지에 대해선 결론을 못 내렸다.


돌아가는 길은 유달리 막혔다. 시대 갈지 강대 갈지 잘 생각을 해보라는 듯이 말이다. 한강을 건너는 중에도 내 고민은 이어졌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강 바닥에 있는 이 세계로 가는 버튼을 누르고 싶다는 충동은 들지 않았다. 시대를 가든 강대를 가든 나는 280일만 더 공부하면 되니까. 이미 그 짓을 해봤으니 한 번 더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계속된 자기 합리화 끝에 내린 정신 승리일지도 몰랐다. 수능 고사장에서 나올 때만 해도, 아니 메가스터디에 가채점 답을 입력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슨 일이 있든 삼수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나를 삼수의 길로 내몰았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잠재적 삼수생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최종 선택을 또 미룬 채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내 불운한 처지를 수용하자 마음은 쓸데없이 편해졌다. 1년도 채 안 되는 딱 280일. 그중에서 주말을 빼면 실질적인 등원 횟수는 200번 남짓이었다. 200번이면 해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영혼 없이 폰질을 하던 중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화면이 떴다. 일단 번호부터 확인했다. 지방 쪽 지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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