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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Nov 14. 2022

내가 그를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

사건의 지평선

우리의 이별은 사고였다.

쌓이고 쌓인 감정과 사건들 때문에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그런 사고가 우리에게 생겨서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그렇게 사랑한다면 이런 일이 있어도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Y에게는

 "네 상황이 쪽팔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못 잡는 거 아니야?"

라고 물을 수도 있고,


나에게는

"남자 집이 망하니까 얼른 발 빼는 거 아니야?"

라고 물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둘이 썸 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봤던 지인들에게 파혼 소식을 알렸을 때,

"두 분은 괜찮은 거죠?", "결혼을 미룬 거죠?"

라는 질문을 꽤 들었다.


만약 우리가 결혼을 코앞에 둔 예비부부가 아니라 그냥 연인이었다면 난 절대 그를 떠나지 못했을 거다.

가장 힘든 시기를 겪을 그 옆을 어떻게든 지켰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파혼으로 나만큼 나의 부모님이 상처를 받았다.

내 마음이 다친 걸 보는 부모님의 마음이 타들어가는 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Y의 아버지가 내 앞에 쳐버린 선을 넘을 용기가 없었다.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에 '노력은 우리에게 정답이 아니라서 마지막 선물은 산뜻한 안녕'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랬다. 지금 우리가 노력한다고 바뀔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어느덧 나에게 소중한 Y라는 존재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큰 두려움이 되어버렸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여러 잡음이 생길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거기에 불면증은 덤.

수능 때도 찾지 않았던 우황청심원을 가방에 넣고 다녔었다.

Y도 내가 이런 불안함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잘해보고 싶었을 거다.

결혼 후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나에게 행복만 주고 싶었겠지.


그리고 그가 여러 사건들을 숨기고 나에게 다 잘 해결됐다는 식으로 말한 걸 알았을 때,

사소한 말 마저 다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너 청첩장 친구들 주긴 했어?', '그날 예복 보고 온건 맞아?' '상견례 식당 예약한 게 맞긴 해?'

이런 의심이 드는 순간,

아... 우리 관계는 이제 끝이 났구나, 라는 걸 알았다. 이 끝이 받아들여졌다.


하필이면 수많은 걱정의 상상 회로를 돌린 것 중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 버렸기 때문에 난 정신적으로도 많이 흔들렸다.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희망적인 부분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만 같았다.

사실 이 부분은 아직도 자신 없지만 글쓰기를 통해,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중이다.

봄이 올 때까지 이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 멎지 않으면 병원에 찾아갈 마음을 먹고서.




그렇지만 나는 Y를 원망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힘들어하지 않을 순 없어도 자책은 하지 말라고 말했다.

네가 나를 지키겠다고 한 방법은 너무나도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난 왜 그랬는지 이해한다고.


밤마다 그를 걱정한다.

가족도 친구에게도 고통을 말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그 사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듦을 표현하는 데는 한없이 서툴렀던 사람이다.

반대로 난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내가 힘들 때 짜증과 예민함을 마구 뿜어내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Y를 만나는 약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이 변했다.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내 예민함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웠다.

물밀듯이 쏟아져온 그의 다정함과 사랑이 나를 성장시켰다.

지금 내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 또한 그에게 받은 마음 덕분이다.


그래서 Y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난 누군가를 또 그렇게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누군가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을 자신이 있다.

그가 나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인지 수도 없이 말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화가 나는 건 나는 이렇게 단단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Y는 나를 너무 얕봤다는 것이다.

집안이 어려워지는 그런 일들을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줘도 난 견딜 수 있었는데.

바보 같은 놈이 날 얕봐도 너무 얕봤지.


그래서 나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주위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한 그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을 뿐,

우리의 헤어짐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의 미래를 지켜내지 못했다고 그를 탓할 수는 없다.


윤하의 노래 가사처럼 이제 우리는 익숙함에 속아 진심을 속이지 말고,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하고,

고마워하고...

그래도 이제는 너를, 우리의 추억을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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