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는 내가 알아서 틀을게.
우리가 연인이던 마지막 날 밤,
9시에 가게 문을 닫고 나와 10시쯤 그를 만났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제일 기본적인 성혼 서약서를 읽어보기로 한 날이었다.
나보다 눈물이 더 많았던 그 남자.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다 우는 건 기본. 기념일마다 건넨 짧은 편지에도 눈물을 찍었다.
사람이 항상 북적이는 샤부샤부 집의 소음 속에서 내가 툭 건넨 에어팟에 감동받아 훌쩍거리던 그였다.
새벽에 연락이 온 날도 있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방금 결혼식 꿈을 꿨다고 했다.
자기가 폴 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축가로 불렀는데 꿈에서도 울컥했다며....
눈을 뜨고서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떨려. 얼른 결혼식 날이 오면 좋겠어."
그러며 노래를 흥얼거렸었지.
사실 그는 축가로 남진의 '둥지'를 부르기로 했었다.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현실일까 꿈일까! 사실일까 아닐까!
헷갈리고 서 있지마. 우~ 사랑이 뭔지 그동안 몰랐지.
내 품에 둥지를 틀어봐~
처음 그의 축가 계획을 듣고는 경악했지만, 나름 의미가 있던 노래라
"그래. 우리 결혼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라고 허허... 큰맘 먹고 허락을 해줬다.
둥지는 그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불렀던 노래다.
아르바이트 생으로 내가 일하던 곳에 왔던 그 애. 신입 환영 기념 겸 첫 번째 회식 날이었나?
안 어울리게 낯을 가리는 듯 노래방에서 구석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마이크를 잡더니 돌변했다.
걸쭉하게 둥지를 부르던 그 애.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며 흥에 취하던 그 애.
유독 개구지고 특이한 애들이 모였던 우리 가게였다.
'오우, 역시... 역시 너도 도라이구나.'
라며 충격과 공포로 입을 떡 벌렸었다.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 나인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자꾸 둥지가 맴돌았다.
빵댕이를 초단위로 흔들어대다 노래가 끝나자 또 조용히 자리에 앉았던 그 애.
아마 그날이 첫날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 마음이 시작하려고 꿈틀 했던 첫날.
그리고 그 마음이 정점을 찍고 끝이 났던 한 달 전 그때의 밤이 되기 며칠 전.
"그냥 서약서 읽지 말까? 빼버릴까? 우리 백퍼 울어. 끝까지 못 읽을 거 같아."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는 게 어딨어! 무조건 읽어야지!"
그는 오열할지언정 성혼 서약서는 꼭 읽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었다.
그런데 우린 마지막 날, 성혼 서약서를 꺼내보지도 않았다.
왜였을까? 묘했던 그날의 분위기.
말끔해 보이는 집에 가구를 다 빼고 나면 남아있는 곰팡이 얼룩에 경악을 할 때가 있다.
'내 머리맡에 이런 게 있었다고?!'
완벽할 줄 알았던 그날 공기는 어딘가 그런 곰팡이가 슨 마냥 텁텁했다.
나도 그도 성혼 서약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다.
소리 내어 읽었더라면 그의 음성이 오래 남아있었을 것만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나인데... 이상하게 성혼 서약서를 직접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알게 모르게 지쳐가고 있었나 보다.
구석 어딘가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에 서서히 마음이 얼룩지고 있었나 보다.
시간이 흐르면, 나에게 또 성혼 서약서를 읽을지 말지 고민하는 그런 날이 올까?
그때는 둘이 함께 읽는 연습이 아니라 문장을 쓰는 고민을 해보고 싶다.
"이 단어를 쓰면 어때? 이 내용을 넣을까?"
그런 고민을 함께 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음... 너무 까마득한 미래로 느껴지는 일이다.
언제 닿을지, 아니 닿을 순 있을지 감도 안 잡히는 미래.
그래서인가 참 무던하다.
마음이 시작했던 그날을 떠올려도, 마음이 끝나야 했던 그날을 떠올려도.
내 일도, 내 친구 일도 아닌 아주 먼 관심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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