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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03. 2022

좋은 시는 왜 좋을까 - 2

서대경


서대경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로 속에서 미로가 되어 떠돌 때, 예기치 않은 부동성(不動性)을 내 안에서 감각하게 된다." 그는 2012년에 문학동네에서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습니다. 삶이 정말 미로고,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모든 시도가 결국 미로의 베끼기이며 미로 되기에 불과한 것이라면, 시는 쓰일 수 없고 쓰이더라도 묶일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갑작스러운' 중심에 시인들은 묶이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시는 세계를 쫓아냅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의 근원으로 쫓아냅니다.



가을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잔에 술을 채우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어디서 난 원숭이냐고 물었다 「구역질이 나서 토했더니 이 녀석이 나왔네」 나는 잘게 자른 오징어 조각을 원숭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여운 짐승이군. 자네도 알다시피 그놈은 자네의 억압된 무의식의 외화된 형체일세」 「그렇겠지」 우리는 오징어 조각을 물어뜯고 있는 원숭이의 작은 주둥이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저 이빨 좀 보게. 그리고 저 피처럼 붉은 눈을 보게. 겁먹은 듯 보이지만 저놈의 본성은 교활하고 잔인하지」 내게 술을 따르던 사내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물론 자네를 공격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닐세」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원숭이를 품에 안은 채 낙엽 깔린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밤하늘은 맑고 차가웠다 그것은 자꾸만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고통스럽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삭였다 「슬프고 고통스럽니?」 「응」 품속에서 원숭이의 힘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를 부인하고 너를 저주했지. 너를 때리고 너를 목 졸랐다. 하지만 넌 너 자신이 나의 억압된 무의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응」 「너는 죽고 싶니?」 「죽고 싶어」 「하지만 넌 나의 환상일 뿐이야」 「죽고 싶어」 나는 천천히 품속에서 온몸이 오그라든 채 떨고 있는 그것을 꺼냈다 그것의 짧은 잿빛 털 위로 가을의 가늘고 메마른 달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너는 누구니?」 「죽고 싶어」 작고 투명한 핏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이 시는 해석하고자 접근하면 난해한 시입니다. 무엇보다도 "원숭이"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분명한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소설을 읽는 듯이 그냥 읽으면 의외로 술술 읽힙니다. 술에 취한 밤, 자신을 새로 발견한 듯 낯설게 돌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정황입니다.


'나'가 술집 화장실에서 토한 원숭이는 대체 무엇일까요? 시 속에서 '나'의 술상대("사내")는 그것이 '나'의 억압된 무의식이라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3연에서 '나'는 원숭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정체가 '나'의 무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이미 안다고. 원숭이가 안다는 건 당연히 '나'가 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나'는 사내와 맞서고 있는 걸까요? 그렇게 보긴 힘듭니다. 한 편의 시는 다양한 화자를 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아도 분열하여 서로 맞서거나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화자와 자아를 조직하고, 배치하고, 저마다 말하게끔 하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무대 뒤편의 그 '자기조작적인 입출력 장치'를 일컬어 시의 주체라고 합니다. 시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주체의 드러남입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긴장감이 발생하는 곳은, '나'와 사내와 원숭이 사이의 괴리가 드러나는 몇 구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깨진 목소리들이 반드시 어딘가에서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긴장이 발생합니다.


흔히 시의 목적으로 생각되는 것을 이 시는 중간에 그냥 성취해 버립니다. 수수께끼를 풀어놓고 출발하는 겁니다. "원숭이가 대체 뭐야?" "그건 화자의 억압된 무의식이야."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현실에서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지금 내가 슬프고 괴로운 것은 내가 겪은 어떤 일 혹은 내가 얽힌 어떤 의식 때문이야, 라며 마치 자신을 넘어선 듯이 자신을 객관화합니다. 이 시는 객관성 자체와 맞섭니다. '나'는 자신의 괴로움에 대한 인식조차 가짜라는 인식에 이릅니다("넌 나의 환상일 뿐이야"). 그러나 그곳은 종착지가 못 됩니다. 인식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목적만 가집니다. 그것은 사라짐입니다. 자기성찰을 해봤자 사람이 자신에 대한 어떤 '언어화'한 이해와도 온전히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뿐입니다. 내 안의 어둠을 꺼내서, 마주보고, 이런저런 규명을 해보는데도, "죽고 싶어"라는 답만 되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그것이 춥고 어질어질한 가을밤의 일이라면.



차단기 기둥 곁에서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 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 가는 풀, 어두워져 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동요 '아기염소'를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너무나도 진짜 같은 꿈 이야기군요. 그런데 정확히 어떤 점이 진짜 같습니까? 이 꿈은 현실과 닮아서 생생한 게 아닙니다. 현실일 리가 없어서 생생한 것입니다. '나'가 염소가 된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아 이건 자각몽인데, 자각몽은 꿈으로 파악된 꿈이기 때문에, 현실로 위장한 그 어떤 꿈보다도 꿈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시에 따르면 '나'는 너무나 "염소적"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열하는 요소가 실제로 염소답습니까? "나의 생각"이 염소적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나'의 생각이 염소의 생각이라면 그건 '나'가 염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가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근거가 바로 '나'의 염소적인 생각이므로, 염소에 대한 '나'의 동일시는 논리적 순환에 갇혀 있습니다. 염소의 목소리가 쓸쓸하다는 것도 그렇지요. 그건 염소에 대한 '나'의 관념이 끼어든 대목이지 않습니까? 풀의 고요, 풀의 어둠은 더합니다. 그들은 염소가 있는 풍경에 삽입됨으로써 염소적인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꿈의 풍경을 만든 것은 '나'입니다. '나'는 자신이 염소라는 생각에 갇힌 존재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나'는 염소 자체고, 주변의 요소들을 염소적인 성질에 필연적으로 가두는 존재일까요?


요컨대 이 시에는 출발점이 없습니다. '나'가 자신을 염소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현실의 동요 '아기염소'일지도 모릅니다. 엄마, 하고 부르는 순간,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나'는 동요 속 염소라는 기표에 달라붙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엄마가 나를 부른 게 진짜일지도 모릅니다. 그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고, '나'는 어째선지 엄마에게 갈 수 없기에, 그때 발생한 고립감과 외로움이 '나'를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인" 염소로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정말 그냥 염소가 된 꿈이었을까요? 이 시를 지배하는 묘한 쓸쓸함의 정서는 바로 이런 혼란에서 유발됩니다. 주체는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는 정돈된 서사로부터 내쫓긴 처지이고, 결코 "어릴 적 우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닌자


검은 복면의 사내가 나의 머리를 허리춤에 매달고 달빛 깔린 기와지붕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머리를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욕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봐. 대체 누가 날 죽이라고 했소? 복면의 사내는 말없이 처마를 타넘었다.


그는 놀랍도록 빨리 달렸고 내 몸은 그의 허리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내 머리의 낭패한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 죽어라 뒤쫓아갔다. 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균형이 안 잡혀 비틀거렸다. 나는 내 머리를 쫓아오는 내 몸을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뜨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달빛 깔린 골목이 눈부셨다. 복면의 사내는 힘에 부치는지 점점 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제기랄. 조금만 더 빨리. 내 머리가 내게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 머리가 분명한데...... 이런 머리가...... 이런 머리로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머리를 똑똑히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사내는 달리고 달빛은 새파랗게 내리고...... 이런 머리가...... 이런 머리로는...... 하고 내 머리는 중얼거렸다.


나는 내 몸보다 사내가 내 몸 같아서 그의 몸이 기우뚱할 때 어어 조심해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지만 머지않아 귓가를 휙휙 지나가는 바람과 바람에 실려오는 벚꽃 향기에 잠잠히 취해버렸다. 내 몸은 비틀대면서도 용케 사내를 따라 지붕을 타넘었다. 타넘고...... 타넘고...... 타넘고...... 그러가 갑자기 사내가 지붕 끝에서 내 몸을 향해 홱 돌아섰다. 제기랄! 죽은 놈이 죽어라 쫓아오면 어쩌란 거야! 사내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거대한 벚꽃나무 숲 아래로 몸을 날렸고 나는 허공에 휩싸이는 내 머리의 아득하고 환한 외마디 속에서 그만 정신을 잃었다.



무척 재미있는 시입니다. 닌자("검은 복면의 사내") - 나의 머리 - 나의 몸 사이의 교차가 인상적입니다. 기술 측면에서 보면, 이 시는 시라는 장르와 그다지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개연성'과 '논리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이 시에서도 '나'는 여기저기 나뉘고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 보면 분열의 과정이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나'는 우선 머리입니다. 목이 잘린 채 닌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가는 화자입니다. '나'는 머리를 찾아 달려오는 몸이기도 합니다. 달리는 몸을 향해 외칩니다. 더 빨리, '나'야, 더 빨리 달려와. 그리고 '나'는 닌자이기도 합니다. 이미 '나'의 머리는 닌자와 운명공동체입니다. '나'는 "내 몸보다 사내가 내 몸 같"다고 느끼는데, 그건 어쩌면 뒤쫓아오는 몸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몸은 이제 닌자를 쫓는지 머리를 쫓는지도 모르고 달립니다.


특히 3연을 보십시오. 이때의 '내 머리"는 닌자에게 빼앗긴 머리일 수도, '나'의 몸에 달린 '없는 머리 , 결핍으로서의 머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서술이 두 갈래로 작동합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이런 머리로는", 이런 머리만 가지고는, ①닌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②닌자를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머리를 똑똑히 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①나 자신이 머리이므로, 거울을 보지 않는 한 내 머리를 볼 수는 없으니까. 또는 ②나는 머리 없는 몸이므로, 내 머리를 보기 위한 눈도 없는 상태이니까. "어어 조심해"도 그렇지요. 그건 자기 머리가 상할 것들 우려해서 몸이 닌자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합니다. 자기 몸보다 닌자("사내")가 진짜 자기 몸 같다고 느끼는 것도 그럴싸합니다. 사실상 '나'(몸)는 머리를 되찾겠다는 욕망 따문에 존재하는 무엇인데, 그렇다면 '나'는 머리를 뺏어간 닌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무엇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닌자, 내 머리, 내 몸, 즉 '나'의 세 가지 양태 모두는 추적의 정황이라는 무한궤도, 이 컨베이어 벨트에 놓여 있습니다. 아니면 <가을밤>처럼 말해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살인을 저지른 닌자가 느끼는 죄책감의 '외화된 형체'라고요. ("죽은 놈이 죽어라 쫓아오면 어쩌란 거야!") 정말 그렇다고 한들, 시 속의 세계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세계입니다. 주체는 난관을 붙들고 있습니다. 일순 난관에 취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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