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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트랜스

2022. 02. 18.

참조점을 찍는 일은 편리하고 두렵다. 기억하기로는 이천십 년대 초중반 한 차례 여성주의 담론이 인지도 면에서 큰 도약을 했고, 이는 그 담론의 역사가 더 활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담론에 참여할 땐 발화자가 과거의 참조점들을 소급적으로 승인하며 자기 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있었던 그와 같은 소급의 경험 가운데 하나는 윤김지영 교수의 '분노의 형이상학'을 몇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읽은 것이다. 당시 트랜스젠더의 여성주의 집회 참여를 시스젠더 여성들이 (벌써 문장의 이 시점에 요구되어야 할 참조점과 용어의 맥락에 대한 해명 또는 규명이 얼마나 산적했는가를 보면 여성주의적 논의의 난점인 동시에 힘인 사려 깊음이 드러난다) 차단하는 일이 논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살면서 본 바 대부분의 논란은 애초에 불필요하지만, 필요한 경우라면 그건 좋은 것이다. 윤김 교수의 이 논문에서와 같은 응답을 어떤 식으로든 촉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때에도 지금도 나는 트랜스젠더의 편인 것 같다. 따라서 내가 이해한 대로 당시의 쟁점을 톺으면 그 결과는 비판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스스로에 주지시키는 한편, 해당 논문을 읽으며 떠오른 것을 일기에 정리해둔다.


논문의 요점은 이렇다. 여성이 겪는 '익숙한 공포'에 기반한 분노와, '낯선 공포'에 기반한 질서에 대해 고착적인 혐오를 구분하고, 분노의 탈주(들뢰즈 용어)적 역량을 강조하는 것. 여성 불법촬영 항의 시위에서의 트랜스여성 참여 거부를 혐오 논리로 일축하는 데 반대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물질주의 페미니즘이 논리를 뒷받침한다. 이는 신유물론적 관점에서 재인식된 페미니즘으로, 몸-물질 행위자로서의 역량을 인식하며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실체, 또는 신체와 영향을 교환하는 수많은 물질/상품을 포함한 무수한 사물들) 사이 위계를 폐지하는 이론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여성의 실존은 다르게 된다. 영향을 주고받는 행위자로서의 몸의 조건이 다르게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존재론적 관점이 정치적 의제와 얽힘에 따라, 신유물론에 기반한 실천의 난점이 드러난다. 즉 역사적으로 관계 맺어진 주체(이 경우에 시위대)가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도 자기를 수행적이며 불연속적인 '물질'로 인지하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어떤 시점에 단절을 도입하는 순간, 기묘하게도 시위대는 어떤 의미에서 객체-지향적인 것이 된다. 그들은 맥락상 특유한 것임에 따라 특수한 무엇이 되고 만다. 이 경우 신유물론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이 되살아나게 된다. 즉 주체를 대상의 한 변형된 기호로 치부함으로써 오히려 주체의 자리를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을 '인간관계를 새롭게 작동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한 캐런 배러드를 인용한 것에 비추면 더 문제적이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트랜스여성의 여성주의적 실천을 비-트랜스-여성주의적 실천 주체의 주체성으로부터 갈라내는 일은, 그 실천에 관계하는 '주체관계'를 새롭게 작동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고민은 '야망보지' 프로젝트에 와서 심화된다. 프로젝트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오도된 자기 계발성을 지향한다는 혐의를 부인하며, 저자는 운동의 탈주체적 양태, 변이체적 성격을 주장한다. 이때 그런 성격으로의 이행은 그 해체성과 정치기획적 부정성에 의해서 가치를 보장받는다. 기존 가부장제 질서에 저항하는 항이라는 점에서, '야망보지'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개인주의적 자아를 수용하는 남근선망의 일환이 아니라 그것을 전방위적으로 초과하는 실천 주체가 된다. 실제로 그런가? 논문에서 쓰이는 '야망'이라는 말은, '보지'가 비-야망의 기호로 언제나 소환되고 소비되었음을 문제 삼은 언어전략으로 비친다. 그래서 이 야망은 우리가 그 바깥에서 탈-야망적 주체성으로 상상하게 되는 어떤 상태와 특유한 관계를 이룬다. 즉 여성주의적 맥락에서의 '야망'에 근거해 행위할 수 없는, 4B 운동 등으로 구체화된 연대적 레짐에 동참할 조건을 벗어나는 이들이 미묘한 위치에 놓인다. 이들은 '미증유의 길', 새로운 야망 서사로 자기를 읽을 수 없다. 읽지 않을 수도 없다. 현실에서 그들이 야망과 비-야망의 대립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어떤 세계, 어떤 행동 양식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보지가 야망 없는 기호였다면, 그건 아마도 '자트릭스'가 야망도 비-야망도 아닌 나머지에 속한 것인(또는 그 상상적 전체인) 보지를 체제의 내면화 회로에 귀속시킨 결과다. 그렇다면 그 기호화의 처소에서 야망부터를 전유하지 않는 한, 즉 야망의 이분법 자체와 관계하는 일 없이는, 모든 행위가 이미 이분법 이후에 가능하다는 이 거대한 은폐를 거부할 길이 없어진다. 내 생각엔 그렇다. 우리는 '야망보지' 안에서 야망이 내속적으로 실패하는 곳에 주목해야 한다. 보지를 대상화하여 이루어진 세계의 권력관계를 해체하는 일은 그럼으로써 성사된다. 어쩌면 이 모든 불만이 "심급"에 대한 저자와의 견해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 자신을 보지 없는 존재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논리적 기만일 뿐더러 역설적으로 명백한 팔루스 중심주의다. 그런데 권력에 대해서라면, 나는 자신을 권력 있는 존재로 봐도 좋다. 그 시각만이 나에게 지배에 맞설 역동적 피지배성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트랜스여성은 이질적인 실존의 교차점으로서, 불가능한 '누빔점'으로서 스스로 왔다. 그것은 공감을 요청하는 종류의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연대 바깥에서의 반응을 요청한다. 그밖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저자의 말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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