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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11. 2022

좋은 시는 왜 좋을까 - 3

김종삼

시인, 하면 떠오르는 비생활인의 이미지는 오늘날 자주 도마에 오릅니다. 그것이 현실 사회의 참여자인 시인을 등한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예술 노동의 가시화라는 측면에서 그런 접근이 비판받곤 합니다. 강렬한 데카당의 이미지는 일하는 자로서의 시인뿐 아니라 그의 작품까지도 비현실적으로 뭉개기 쉽습니다. 그런데 김종삼이라는 사람은 정말 그랬습니다. 시 고료는 술값으로 날렸고, 다니는 가게마다 외상을 쌓았습니다. 외상값을 시로 치르기도 했습니다. 시를 예술품 이전에 사물로 취급한 셈입니다(당연히 시는 사물입니다). 이와 같은 시에 대한 낭만화의 거부, 때로 신학적으로 형상화되는 '가장 낮은 존재'로서의 시인 관념, 거기서 연유하는 시 쓰기의 역설적인 특권화 등이 김종삼의 창작적 태도에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이 날카로운 언어 미학과 결합하여 그의 시세계를 이룹니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운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모든 문장이 직유형 어미("처럼")로 끝나는 이 시에는 정작 원관념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등에 눈을 맞은 양 떼가 그려져 있는 카드입니다. 그것은 서양의 명절을 기념하는 물건입니다. 상처 입은 땅에 태어난 "가난한 아이"는 그림 속 기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퍽 아름답습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내용이 없는 대로 그냥 아름다운, 그런 아름다움입니다. 명확하게 지시하는 바가 있어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방향성이 없이 사방으로 울려 퍼집니다. 제목의 '북 치는 소년'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이것은 낯선 세계의 아름다움이 한 소년의 가슴으로 북을 치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다시 보니, 카드에 그려진 것은 눈 맞는 어린 양들입니다. 진눈깨비를 등에 업고서 모인 저 어린 양을 닮은 자가 이 세상의 누구냐, 묻는다면 그건 아무래도 시 속의 "가난한 아이"일 것입니다. 아이가 그런 종교적 박애 정신에 감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지 양들이 등에 나누어서 진 창백한 것이 그에게는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 존재가 그쪽으로 기우는 대상의 실체, 마음의 원관념이 필요하지 않은, 마음이 음파처럼 점점 넓게 번지는 순간입니다.



원정(園丁)


평과 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번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 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周圍)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無邊)하였다. 

안쪽 흙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를 감싼 기독교적 색채입니다. '평과'나 '가시 울타리' 등의 시어가 그런 연상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서사의 측면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나'는 과수원이 펼쳐진 땅에 갑니다. 누군가의 말에 따라 유리 온실로 걸어가고, 과실이 가득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곳에서 집어 드는 과실마다 썩고 벌레에 먹혀 있습니다. 이 시는 일단 실낙원 서사로 읽힙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장치가 더 복잡합니다.


우선 '나'에게 길을 가르쳐준 '그'의 정체가 묘연합니다. "며칠 만에 한 번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다는 서술에 따르면, 화자는 정신불안이나 언어장애 등을 앓는 환자를 병문안 한 듯합니다. '나'는 순전히 '그'의 의지에 따라 걷습니다. 가시나무 무성한 척박한 고행의 길을 잠시 벗어나서, 구름처럼 식물의 기운이 풍겨오는 환상적 풍경, 에덴 동산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나는 자신의 저주받은 손, 환영받지 못하는 그 손을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대체 누구이길래 '나'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는 걸까요?


유추하건대 '그'는 '나'의 내면에서 발화하는 중입니다. 그의 이동 명령에 담긴 진의는, 어서 저곳(온실)에 가서 너('나')의 환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일종의 심리적 내시경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진찰이 병을 심화하는 원인이라는 점입니다. "썩지 않은 과실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는 말이 그것을 드러냅니다. 정리하자면, 나는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 병들어 있는 비극적 자아이고(6연), 병든 자신을 직시하도록 요청하는 성찰의 목소리이며(2연), 그 성찰로 인해 더 심하게 병들고 마는 자입니다(6연 마지막 행). 게다가 나는 이 연쇄악의 책임이 자신의 사유능력에 있음을 알고 나를 꾸짖는 자("원정")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하는 원정의 말,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뼈저리게 아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키는 말,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바깥으로, 내 안에서 발화하는 타자에게로 여러 겹 밀려납니다. '나'는 세계를 썩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풍경


싱그러운 거목(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 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너무 조용합니다.


어린아이와 음악은 김종삼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김종삼의 시 속 어린아이는 주로 가난하고, 고독하지 않으면 분열된 채 죽어가고 있으며, 이미 죽었거나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그런 어린아이입니다. 그리고 김종삼의 시 속 음악이란 대개 침묵에 가까운 그런 음악입니다.


이 시는 세 개 연에 걸쳐 '가고 있음'의 이미지를 접붙인 구조입니다. 처음에 가고 있는 것은 언덕입니다. 상식적으로 언덕은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언덕이 마치 사람이 가듯이 어디론가 전천히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때 '천천히'라는 말로 표현된 속력은 한없이 정지에 가까운 어떤 속력일 것입니다. 정황상 '나'는 거목이 모여 자란 언덕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은 누구나 한 번씩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무척 흔한 길인데, 어쩐지 현실의 것이 아닌 듯한, 기이한 생명력을 품은, “싱그러운 거목들"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가다'라는 동사가 비일상적인 울림을 지니는 건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죽었을 때도 그가 갔다고 말하고, 계절이 바뀌었을 때도 한 계절이 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나'는 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정지에 가까운 어떤 속력으로.


3연의 '아이'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들고 있는 악기도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입니다. 그런 악기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요? 아마 세상에 흐르지 않는 소리가 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마땅찮은 선명한 소리. "너무 조용하다"라는 말은 조용함을 뒤흔드는 말입니다. 조용함의 형상을 한 어떤 소리, 아주 큰 소리가 들리게 만드는 말입니다.


'나'는 가지 않으면서도 가고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와 더불어 살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런 역설의 세계에 갇혀서라도 그가 살아가는 건 어쩌면 그가 마지막에 도착할 어딘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고 싶은 곳. 그곳은 풍경 너머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풍경 너머는 없습니다. 나의 방랑은 닫힌 프레임 속을 맴도는 방랑입니다. 방랑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가 그 영원 너머로 가고 나면,


너무 조용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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