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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Apr 11. 2022

좋은 시는 왜 좋을까 - 5

김행숙

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게 뭐냐고 묻는다면, (핵심 같은 건 모른다고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가혹한 상황을 가정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 중 하나는 이미지일 게 분명합니다. 김행숙 시인은 이미지를 탁월하게 다룹니다. 시 속의 이미지는 여러 작용 속에 끼어 있습니다. 확장되기도 하고, 구체화하면서 점점 딱딱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반대로 무척 유연해져서, 세상을 다 담을 만한 큰 접시처럼 펼쳐지기도 합니다. 자주 하는 비유처럼 정말 시 쓰기는 흙으로 사기를 빚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일상의 우리 감각은 매끈하고 대칭적이고 균일한 것을 반깁니다. 그러나 사용을 벗어나서, 우리가 정지하여 사물을 감상하려고 하는 시점부터는 손으로 빚은 그 사물이 불가피하게 튀어 있음을 느낍니다. 시적 태도라는 것은 오히려 그런 불가피한 조작성에 대한 '열림'일 것입니다. 손자국을 지우려고 애쓰지 않는 것입니다. 손자국을 갖고 뭔가 만들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서, 가까 곳에서 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이 시는 포옹에 대한 무척 사실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승훈 시인도 그렇게 쓴 적이 있을 겁니다. '너의 품에 안겨서 나는 이제 너의 얼굴도 볼 수 없다'고. 포옹은 두 사람이 몸을 겹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는 일이고, 볼 수 없는데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만져지는 것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검정에 매우 가까운 것일 뿐 검정은 못 됩니다. 몸이 아무리 가까워도 리가 끝내 하나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무서운 사실을 확인하는 게 포옹의 진짜 역할인지도 모릅니다. 그 후에 포옹은 어디로 갑니까? 포옹은 포옹을 넘어서서, 이별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마치 포옹의 연장처럼 서로를 뚫고 나아갑니다. 포옹이 끝나면 그 자리에는 어떤 틈새가 남습니다. 한번 포옹한 두 사람은 포의 순간으로부터 평생 조금씩 멀어집니다. 그런데 멀어진다는 건 거기에 연결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갈수록 크게 벌어지는 입, 벌어지는데 거기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입. 두 사람은 그 입을 둘러싼 한 쌍의 입술이 됩니다. 가끔 그들은 뒤로 돌아 "시간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밉니다. 지나간 추억에 귀 기울여도 들리는 건 침뿐입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그들이 평생에 걸쳐 협력하는 소리입니다.



문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람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지 않겠다,라고 썼다. 일기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문지기가 정말로 어떤 직업인지 알기 위해, 이 시는 하나의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문지기는 장소(“여기서 ")와 행위("시면 ")의 불합치를 부정하는 ("안 됩니다") 직업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문 앞에 찾아왔을 때는 그만의 목적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지기는 행위만이 아니라 행위의 목적까지 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적을 가지고 왔던 사람이 또 안 올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문지기는 같은 부정을 매일 해야 합니다. 즉 문지기는 부정할 대상을 매일 기다려야 합니다. 매일 기다린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문지기의 원칙은, 그 원칙에 의해 거절당하는 상대방을 통해야만 성립됩니다. 그런데 이런 공조가 있더라도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문지기는 자신의 의존성, 자기 '사랑'을 부정해야 합니다. 참 슬픈 직업입니다. 슬프긴 해도 문지기는 제 천직을 수행합니다. 이런 건 유기할 수 있는 종류의 직업이 아닙니다. 존재 전체가 걸려 있으니까요. 문지기로서 서 있지 않으면 문지기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각자 어떤 원칙을 대변하고, 서로 맞서고, 부정합니다. 배타성이 없이는 인간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잠깐 천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반성의 시간입니다. 나의 인간적 한계는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겁니다. 하지만, 내가 나의 한계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래서 울면 안 된다고 자신을 향해 다짐할 때에만, 나에게는 울 자격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따져 보면 '문지기' 같은 시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인간에게 울 자격을 주려고 태어난 것입니다.



8時가 없어진다면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갔으니
8시처럼, 목요일 저녁처럼, 여름날의 긴 오후처럼 돌아오는 중이겠군요
봄에 여름이라고 부르고, 여름에 가을이라고 부르고, 가을에 겨울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당신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둥근 것들, 해와 달,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오는 구두들의 닳은 굽, 뉴욕제과점 모퉁이를 돌아 언덕을 오르는 마을버스들, 자꾸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
그러나 나는 어느샌가 한눈을 팔게 됩니다, 미안해요
그 사이에 8시가 없어지면 당신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어요, 8시가 없어지면
8시 5분이, 9시가, 없어지고, 다음날 아침이 없어지고, 여름날의 소낙비가 없어지고, 가을날의 천둥이 없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없어지고, 겨울 눈꽃축제가 없어지고, 새싹이, 연둣빛 새싹이,
옆집은 한달 보름째 빈집입니다, 세상의 모든 옆집이 빈집이면 내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어요
캄캄한 하늘에 당신이 무한한 원을 긋고 있는 중이라면​



계는 시계 자신의 동를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시계는 시간의 연속성을 잘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아마 시계를 보는 사람이 연속적인 관념을 지녀서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즉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저녁 여덟 시가 없다면 내일 아침 일급 시도 없니다. 한 달 뒤의 월요일도 없어집니다. 내년의 여름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오기로 한 사람의 '언젠가'도 없어집니다. 한없이 멀어집니다. 여덟 시가 없어졌을 뿐인데도, 영영 우리는 다른 길 위에서 구르게 됩니다.


인간의 시간은 반복에 기대 있습니다. 시계의 "둥근” 모양, 시곗바늘의 원동이 나타내듯이요. 들여다보면 실제로 완전히 반복되는 건 없지만, 우린 작년에 간 여름이 올해 '돌아온' 것처럼 말합니다. 떠나간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를 다시 만날 때 그는 이미 다른 시공간에 놓인 존재지만, 우리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자기 자신에게 그러듯) 그의 동일성을 전제합니다. 표지(標識)가 그토록 중요한 건 그 때문입니다. 일곱 시는 여덟 시의 증거입니다. 또 여덟 시는 아시의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옆집"이 있어야 그 옆집의 옆도 있습니다. 옆집이 없으면 세상에는 아무 집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옆집이 빈이면 내 집조차 빈집이 됩니다. 나는 내 영역에서 자꾸 한눈을 팔게 되고, 안정된 원운동 밖으로 튀어 나가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하늘을 반복된 단위로 나누는 무수한 가상의 점, 그중 하나로 붙박여서 '나'는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그 캄캄한 하늘을 가르며 별은 원을 그립니다. 따라서 별이 '나'를 떠나 멀어진다는 건 별이 ''에게 되돌아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순된 두 입장 중 어떤 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원은 무한히 큰 원이어서, 재회로도 완전한 상실로도 결론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헤어짐에 대한 이런 열려 있음, 만남과 상실을 동시에 무한히 미루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시 속에 비유된 '나'의 "옆집"일 것입니다. 거기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대답 없는 그 문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일은 소중한 실패입니다. 대답이 없다는 건 대답이 오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시 쓰기는 같은 이유로, 일부러 답이 없는 질문만 찾아서 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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