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어땠어?" / "아주 좋아, 넌 어때?"
"배가 너무 고파. 아직 밥을 못 먹었거든." / "오 저런..."
제법 친근한 이 대화는 어제 동네 마트 계산대에서 캐셔와 나 사이에서 오간 대화였다. 물론 우리는 어제 처음 본 사이였다.
이 생경한 대화가 바로 매번 마트 갈 때마다 나를 번뇌에 빠뜨리는 이 동네 흔한 스몰 토크(Small Talk)이다. 이 적응 안 되는 짧은 대화는 현지인처럼 여유롭고 위트 있게 답변하지 못한 내가 늘 집에 와서 ‘아! 그때 이렇게 맞받아칠걸!!!’ 하며 이불 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자연스럽게 답해줘야지 비장한 각오를 하고 호기롭게 마트에 가서 위풍당당하게 계산대로 간 터였다. 그런데 배고프다니! 이런 류의 근황 토크는 내 시뮬레이션에는 전혀 없던 것이었다. 내 머리에 시스템 오류가 떴다. 보통 날씨 얘기나, 옷 얘기나 뭐 그런 시시껄렁한 아무런 얘기 하는 게 스몰토크 아니었어???
허를 찔린 나는 그저 안쓰러운 눈빛을 최대한 보내며 외마디 ‘Oh’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어쩌란 말이요? 그래 오늘도 내가 졌다 이놈들아!!’
근데 그 퀭한 눈을 한껏 애처롭게 뜨고 배고프다 말하는 그 얼굴이 왜 그렇게 애잔한지 집에 와서도 한동안 계속 생각이 났다.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이 어제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서 마음이 쓰였다. 아니 그냥 의미 없는 스몰 토크인데 대체 왜 내가 마음을 쓰는 것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캐셔가 잘생겼었나?’
괜찮게 생겼지만 얼굴 때문에 반한건 아닌 것 같았다.
‘눈빛이 특별히 호수처럼 맑았나?’
이것도 아닌 것 같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대단한 인간애나 이타심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그런 게 생길리는 없으니까.
아침밥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뒤지다 말고 어제 그 알 수 없던 연민의 근원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다. 그 아무 의미 없는 스몰토크가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향수였다.
한국인에게 밥은 그냥 쌀밥 한 공기가 아니다. 부모님의 무한한 자식 걱정의 한 줄 요약이자 관계의 친밀도를 높여주는 혹은 누군가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관심과 사랑의 최대치가 바로 먹고사는 이야기, 밥 이야기이다.
어제 그 캐셔의 그 아무 의미 없는 근황토크가 밥 하나로 정을 나누는 한국인의 감성, 그 미묘하고 절대적인 성역의 문을 단박에 열어버린 버린 것이었다. 이 친구 제법일세!
집에 전화드려야겠다. 식사는 하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