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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인천 Sep 09. 2024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 지금의 평화가 있다

국제평화도시 인천 | 굿모닝인천 9월 Vol.369


이제 전우들도 거의 떠나고 없다. 연락이 끊어진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다.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상륙함 해치가 열리기 무섭게 뛰쳐나간 해변, 

가슴까지 올라온 바닷물을 헤치고 육지에 오르니 시가지는 불바다다.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쏟아졌다. 공포가 엄습했지만,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 지금의 평화가 있다. 

그 젊은이들이 어느덧 구순을 넘긴 노인이 됐다.

그들의 입을 통해 그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언제까지일까.



해병대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참전 용사 허영철 씨

老兵

노병, 그날을 말하다


허영철 예비역 상사·94


“상륙작전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디로 상륙하는지는 알지 못했어요. 육지에 가까워질 때 갑판에서 보니 등대를 비롯해 눈에 익은 풍경이 보이더군요. 그래서 인천으로 상륙한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인천상륙작전 참전 용사인 허영철(94, 해병대 2기) 씨에게 인천은 아주 각별한 도시다. 입대 전 인천에서 살았는데 전쟁 중에 인천 땅을 다시 밟아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데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이 고향인 허 씨는 만주목단강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목단강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이다. 그의 아버지는 목단강의 철도국 직원으로 근무했다. 위로는 네 살 많은 형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두 형제는 타국에서 의 힘겨운 삶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중 해방 소식이 들려왔고 형제는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서울살이 또한 만만찮던 터라 형제는 다시 살길을 찾아 인천 동구 송림동으로 둥지를 옮겼다. 이어 형이 군에 입대하고 혼자 남게 되자 자신 또한 해군에 자원입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병대에 편입되면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허 씨 부대(해병대 제1연대)가 미국 해병대와 함께 레드비치를 통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그는 입대 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볼 기회를 얻기도했다.


입대 전 인천에서 살았던 허영철 씨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땅을 다시 밟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인천에서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나니 이제 고향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소대장이 ‘집이 인천인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길래 손을 번쩍 들었어요. 그랬더니 잠시 집에 다녀오라고 하는 거예요. 생각지도 않았던 외출 허가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지요.”


하지만 그가 입대 전 살았던 집은 예전의 그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폭격은 면했지만 전혀 상상하지 못한 용도로 사용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살던 집이 북한군의 사무실로 둔갑해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혹스러웠어요. 간판의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북한군이 점령하고 나서 반동분자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데마음이 착잡하더군요.”


인천종합운동장에 주둔해 있던 허 씨의 부대는 서울 수복을 위해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서울 연희104고지 전투다.

북한군은 연희동 104고지 일대를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처절한 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해병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104고지를 탈환했는데 이는 서울 수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였다.

그는 “북한군이 결사적으로 버티는 바람에 몇 날 며칠 아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라며 “수많은 전우를 잃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무공충무훈장’까지 받은 그였지만 10여 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병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해병으로서,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참전 용사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오늘날까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내가 젊었을 때 한 고생에 대해 후회는 안 해요.”




박학수 예비역 상사·92


전장의 한복판에 있던 10대 소년이 어느덧 90대 노인이 됐다.

박학수(92, 해병대 1기) 씨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여덟 살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전장을 누볐다. 그가 인천에 발을 디딘 곳 또한 한국 해병대의 상륙 지점인 레드비치였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어디에 투입됐는지도 몰랐어요. 지휘관이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 같은 졸병은 부대가 출동하면 그냥 따라가고, 올라가고, 총 쏘고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는 게 전부였지요.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인천에서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충남 천안 출신인 박 씨는 해병대 1기로 6·25 전쟁 당시 각종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었다.

본인 스스로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끊기기 일쑤”라고 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장항, 군산 등의 지명을 언급했는데 6·25 전쟁 발발 직후 해병대가 처음으로 투입된 장항·군산 전투의 기억을 떠올린 듯했다. 어찌 보면 90세를 넘긴 노병에게서 무려 74년 전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원산 상륙작전, 함흥 전투 등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냈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타고 작전에 투입된 기억이 납니다. 원산 상륙작전이었어요. 원산에 상륙한 후 전투를 치르느라 북한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던 것 같아요.”

감사패 등 박학수 씨의 소장품에는 참전 용사로서의 그의 삶이 녹아 있다.



그가 받은 감사패를 통해서도 그의 참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귀하께서는 6·25 전쟁 중 치러진 원산, 함흥 전투에서 불굴의 투지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적의 남하를 저지,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을 보장함으로써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하였을 뿐 아니라, 오늘의 자유롭고 번영된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셨기에 이 패를 드립니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로부터 받은 이 감사패는 “감사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란 문구로 끝을 맺는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해야 할 말이 아닐지 싶다.


박 씨는 갈수록 지워지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었던 신현준 사령관의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시공간을 공유했기 때문인 듯했다. 함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신현준 사령관이 새벽 3~4시에 같이 가는 걸 본 적이 있다고도 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 월미도 포격이 한창이었던 때로 추정된다.

비록 작전 지역이나 시기 등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죽도록 고생한 기억만은 그의 뇌리에 각인돼 있었다.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는 박학수 씨



박 씨는 “잠을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로 나온 꽁꽁 언 김밥을 먹다가 캐뜨린 적도 있다”며 “그때 생각을 하면 너무 기가 막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나왔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도 뉴스를 통해 다른 나라의 전쟁 소식을 접하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정치권에 대한 일갈도 덧붙였다.


“수많은 목숨을 바쳐가며 죽도록 싸운 끝에 지킨 나라인데, 나라 안에서 서로 쌈박질하는 정치권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제발 나라 발전을 위해 힘을 모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내내 “이야기가 뒤죽박죽됐다”며 미안해 하던 노병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논리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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