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인천 | 굿모닝인천 11월 Vol.371
글·사진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수면장애 치료를 위해 찾은 한의원의 의사는 내게 세상살이에서 비롯되는 근심과 걱정을 불면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의사가 물었다. “나무처럼 고요한 생명을 찾아다니면서도 근심이 가라앉지 않나요?” 나는 대답했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면 온갖 번잡했던 세상살이를 잊을 수 있어요. 하지만 매일 나무 곁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무에서 돌아 나와 세상살이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다시 마음의 화火가 일어나곤 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의사는 말했다. “자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나무가 있으면 좋겠는데, 도시 생활에서는 그게 어렵겠군요.”
이야기 끝에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가 떠올랐다. 세상살이가 고달플 때면 찾아가 그의 큰 그늘에 들어서곤 했던 우리 마을의 큰 나무다. 나무를 찾아가는 데에 10분 조금 더 걸린다. 찻길로 10km, 직선거리로는 3km 남짓의 거리다. 내가 태어나 40년 넘게 살아온 인천의 큰 나무다. 지금만큼 알려지기 전에 나무 근처는 늘 한가롭고 고요했다. 나무 지킴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장수동이라는 행정구역명보다는 옛 이름인 ‘만의골’을 선호한 그들은 나무를 ‘만의골 은행나무’라 불렀고, 스스로 ‘만의골 지킴이’라고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무가 좋아 이웃집 마실 가듯 들르는 사람들이다. 기별도 약속도 없이 우연히 나무 앞에서 만나는 그들과 친구가 됐다. 별다른 편의시설도 없던 그때 간판조차 없는 허름한 칼국숫집에서 국수 한 대접씩 말아 나눠 먹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목신제’라는 이름의 당산제도 지냈다. 수도권의 번잡한 도심에 전통문화가 남아 있다는 건 특별했다. 길굿도 풍물굿도 없이 치러지는 당산제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제사상을 차린 뒤, 나무에 절을 올리고 소원을 비는 게 전부였다. 나무도 당산제도 오래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관할 구청장을 찾아가 구청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구청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난 그는 떠났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구청장의 약속은 늦가을 아침 안개처럼 가뭇없이 사라졌다. 대표적인 산업도시 인천의 도심에 이만큼 크고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신문과 잡지, 방송 등 미디어에 알렸다. 꼭 내 글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나무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며 나무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크고 작은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에 비례해 나무 앞을 흐르는 개천에서는 차츰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주변 식당가에서 쏟아지는 하수를 비롯해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진 개울물은 하루가 다르게 썩어갔고, 800년 동안 뻗어낸 나무뿌리는 그 개울물을 빨아들이며 살아야 했다. 나무의 생육 상태는 점점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치달았다. 나무 곁으로 찾아오던 ‘만의골 지킴이’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세상살이를 잊기 위한 피난처는 둘째 치고 이제 나무를 보호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던 중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묻는 자리에 나도 끼게 되었다. 나는 그때 구청 담당자들에게 지금 이대로라면 나무의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분명히 전했다. 문화재 지정에 앞서 생육 환경을 개선한다는 약속이 먼저라고 다그쳤다.
나무는 곧 천연기념물로 지정됐고, 노란 은행나무 단풍이 화려한 어느 가을날, 나무 앞에서 천연기념물 지정 기념식도 근사하게 치렀다. 얼마 뒤, 관할 구청은 약속대로 나무 주변 환경을 지금처럼 완전히 바꾸어냈다. 넉넉한 생육 공간이 확보됐고, 널찍한 공간 바깥으로 울타리를 세웠으며, 번잡하던 장사치들도 사라졌다. 다시 나무 곁으로 고요와 평화가 찾아들었다. 물론 노란 단풍이 기대되는 가을이면 사람들은 물밀듯 찾아온다. 홀로 나무 그늘에 들어 세상살이를 잊을 수 있던 시절은 지났지만, 이제 나무는 ‘바라보는 나무’로서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가 됐다. 충분한 생육 공간을 확보한 나무는 이제 도심의 넉넉한 땅을 차지하고 도시와 도시 살림살이의 지킴이가 됐다. 우리 인천에는 800년 긴 세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우뚝 선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가 있다. 수면제로 치료할 수 없는 불면증도, 속절없이 이어지는 세상살이의 근심도 잦아들게 하는 큰 나무다. 인천의 가장 빈한한 곳, 수도국산 자락에서 태어나 젊은 날을 모두 수도국산에서 동인천역과 신포동으로 이어지는 언덕배기에서 살아온 인천 사람으로서, 또 나무 작가로서 자부심을 올차게 지켜낸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는 앞으로도 인천 살림살이의 희망이며 위안이고 치유의 상징으로 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