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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pr 30. 2024

이것이 현실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책의 소개 글을 보았지만 선뜻 읽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빠를 보며 다가올 상실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중이었고, 여러 삶의 문제들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보며 혹시 내가 이 책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지치고 너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사람의 조용한 위로와 권면을 받고 싶었다.


그저 바다 건너 낯선 이의  목소리를 통한  위로를 꿈꾸며 책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자아가

다 소진되어 땅끝까지 꺼질 듯한 피로와 낙담을 안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패트릭 브린리는 미술관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 목소리가 나지막하고 다정해서 지칠 때마다 페이지를 넘기며  나도 모르게 몰입하고,  그의 마음에 동화되어 함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거닐었다.

상실의 고통을 치유받기 위해 세상 가장 경이로운 곳으로 숨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책의 홍보문구가 딱 적합하다. 나 역시 일과에 지쳐 허기진 늦은 밤마다 그의 문장 속으로 발 디딜 틈을 찾아 스며 들어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혼식 날 사랑하는 형의 죽음을 맞이한 그는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

라고 고백하며 뉴요커 기자직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취직한다.

그의 말이 나의 심정과 일치해서 한동안 두근거렸다.

나 역시 애쓰고, 사력을 다하고, 매일 동동거리는 삶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어딘가로 숨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죽이며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차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찾아간 이 특별한 일터에서 500여 년 전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일반 소박한 시민작가들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비로소 치유받기 시작한다. 책 속에는 다양한 미술작품들에 대한 소개 및 자신의 감상과 느낌들이 유려한 문체로 마치 손에 잡힐 듯 묘사되어 있다.


나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 책을 읽는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바다 건너 거대한 미술관을 함께 노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미술관 속 작품들 뿐 아니라 자신이 만난 동료들, 가족들 등의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풀어놓는다.


갖가지 사연을 품은 그의 푸른색 근무복 동료들의 얘기, 그의 아내와 부모님, 형 등의 얘기는 그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았음을 알게 해 준다.


그는 결국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라고 말하며, 이제 미술관을 벗어나 치열한 현실의 운동장으로 뛰어들기를 선택한다.


이제 그에게는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큰아이와의 불화, 둘째의 병마, 남편 회사의 어려움, 그리고 일상에서 밀려오는 여러 번잡한 문제들로 서서히 고갈되었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온기 가득한 문장들을 대하면서 그가 겪는 상실의 고통과 아픔에 공명하고 다정한 위로의 속삭임을  느꼈다.

때로는 이렇게 일상의 허물을 벗고 고요한 동굴 같은 안식처로 책을 통해 도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그가 미술관을 떠나 이제 치열한 생의 현장으로 들어가듯, 나 역시 웅크린 채 그저 문제들 앞에 곧추 세웠던 마음과 피로, 허기를 정리하고 꾸역꾸역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의 말대로 '이것이 현실이다'


생이 주는 날카로운 생채기와 상처에 지친 날, 나를 위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듯  비밀스럽고 고요하게 빠져들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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