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대로 동행 Jun 15. 2024

장애인 운전면허증 1호라구요?

아빠의 도전

“엄마, 빨리 나오세요. 늦었어요.”

아들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아침마다 고3 둘째 아들을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준다. 결핵 항생제를 먹느라 몸이 약한 아들이 아침마다 힘들어해서 차를 태워줘야 학교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아들을 위해 운전대를 잡으며 문득, 이제 더 이상 뵐 수 없는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우리를 위해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아주셨던 아빠의 기억.     


소아마비로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던 아빠에게 원천적으로 운전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1980년대 초반이면 더욱 그러했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드문 시기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아빠가 호기롭게 말씀하셨다.

“아빠, 운전면허증 땄다.”

아빠의 말에 우리 세 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980년대 초반, 자동차가 있는 집도 드물던 그 시기에 다리도 불편한 우리 아빠가 운전면허증을 따시다니,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러고 보니 아빠가 운전 연수를 받는다고  외출하곤 하셨던 게 희미하게 기억이 나긴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는 어린 세 딸들을 향해 아빠는 한 번 더 설명해 주셨다.

“정말이야. 아빠 오늘 면허증 땄어. 장애인 운전면허증이 생겼다기에 내가 연수받고 시험 봤잖아. 시험에 하도 많이 떨어져서 포기할까 했다가 이번에 간신히 땄다. 아빠가 차 나오면 꼭 태워줄게.”     


나중에야 알았다. 아빠가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최초로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분이라는 것을.     

그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시험에서 무려 10번 가까이 떨어졌다가 불굴의 의지로 면허 취득을 하셨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그 이후 아빠는 정말로 빨간 차를 뽑아서 멋지게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한 채 사진을 찍으셨다.    


우리는 당시에 드물던 빨간 차가 신기해서 차 주위를 빙빙 돌며 신기해했다.

차 안을 보니 다른 차와는 달리 아빠 차는 운전석에서 모든 운전을 손으로만 조종하도록 돼 있었다. 발을 쓸 수 없는 아빠는 손으로 핸들, 브레이크, 엑셀 등을 다 다루면서 운전하신 것이었다. 보기에는 위험천만하고 불편해 보였지만 아빠는 그렇게 운전할 수 있다는 게 마냥 꿈만 같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날부터 아빠의 차는 당시 초등학생 어린 우리 세 딸들을 태우고 동네를 돌거나, 학교를 태워주는 유용한 친구가 됐다.  저녁때 해가 어스름 지기 시작하면 아빠는 가끔 “누구, 아빠와 드라이브 갈까?”하고 묻곤 하셨다. 그리고 “저요 저요.” 하면서 신나게 손을 흔드는 딸들을 태우고 차를 몰아주셨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뒤로 해가 기우는 석양의 황홀함, 한강 다리를 건너며 우리 뺨을 스치던  바람의 시원함, 뻥 뚫린 도로를 경쾌하게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 안 세계가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창 밖으로 소리 지르고 웃어재끼던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 이후에도 아빠는 당신의 운전 실력을 발휘해서 딸의 시험장에도 데려다주시고, 임신한 딸이 유산위험으로 아플 때는 직접 병원까지 태워 주시고, 회사에 늦는 딸이 동동 거릴 때는 회사까지 태워 주시며 당신의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운전수 역할을 해주셨다.     


그런 아빠가 골반 뼈의 골절로 몸져 누웠다가 수개월만에 간신히 일어났을 때, 간절히 원했던 소망도 ‘새 차’를 갖는 것이었다.     

70대 중반인 아빠 연세에 차를 새로 사서 모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온 가족이 만류했지만 엄마는 아빠를 위해 결기 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네 아빠가 살면 얼마나 사시겠니? 아빠 마지막 소원 이루어 드리자. 할부를 해서라도 네 아빠 소원하는 차 사줄 거다.”     


그리고 엄마는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 주시기 위해 정말로 큰맘 먹고 할부로 새 차를 사셨다. 그 차를 산 날 아빠는 기쁨에 겨운 나머지 혼자 운전해서 동해 바닷가를 갔다고 우리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다. 뼈의 골절로 입원하고 고생하셨던 아빠가 그나마 몸을 추슬러 운전을 하신다는 게 꿈만 같이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점점 아빠의 건강이 무너져 더 이상 목발을 짚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빠의 새 차는 휠체어를 자동으로 실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빠의 몸이 문제였다. 수십 년 동안 목발을 짚고 산 아빠의 어깨 연골이 모두 마모되고, 근육이 닳아져서 더 이상 아빠가 운전을 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아빠가 그토록 사랑했던 차는 이제 주차장 한 편에 오래도록 방치된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아빠의 건강이 회복돼 언젠가 그 차를 다시 타시게 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아빠도 늘 그 차를 한 번만이라도 더 몰고 싶다고 소원을 하셨지만 끝내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꽃이 사그라들듯이 단계적으로 아빠의 육신이 힘을 잃어서 종국에는 오른손으로 수저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아빠  몸의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만류했던 일에 도전하여 우리나라 장애인 최초로 운전면허를 획득한 뒤, 딸들을 뒤에 태우고 신나게 도로를 누비시던 아빠의 꿈이 세월 앞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 순간이다.      


엄마는 아빠가 누워 계신 동안 그 차를 나에게 인수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 혹여 그 차를 볼 때마다 아빠가 생각나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결국 우리는 아쉬움 속에 아빠의 차를 팔았다.     

차가 우리 곁을 떠나듯이 그 이후 아빠도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빠의 차를 그토록 많이 타고 다녔건만 정작 딸인 나는 아빠를 내 차에 태워드린 기억이 없다.

다만, 떠난 아빠 대신 이제 50 넘은 딸이 그때의 아빠처럼 아들을 위해 운전대를 잡는다.      


하늘나라에서 아빠를 만난다면  내가 모는 차에 태워드릴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