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태양은 지고, 사람이 만든 작은 별들이 여기저기에 켜지기 시작했다. "마포 술집", "인생 뭐 있나", "노가리 떨고" 등 수많은 간판들이 하얗고, 노랗게, 붉은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밤이 된 것이다. 낮동안 쓸쓸했던 먹자골목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왁자지껄 말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이 거리에 밤을 왔음을 알려주는 신호음 같다. 분주하지만 가벼운 발걸음,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우며 낮동안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저녁 9시, 난 그녀를 만났다.
나는 전업맘이다. 일어나자마자 자기 전까지 아이들과 남편에게 봉사하며 자칭 servant로 살고 있는 전업맘. 누구에게 고용된 적도 없고, 누가 날 고용하지도 않았지만 난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servant로 살아가고 있다. 다만 마지막 내 자존심으로 아이들과 남편이 나의 눈치를 조금은 보며 살아가게 만든 상급 servant. 이런 내게 밤 9시에 선술집, 맥주집 가득한 이 거리를 걷는 것은 참으로 낯선 일이다.
지난밤 내린 비로 하루 종일 여름답지 않은 선선한 날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공기 중에 있는 물 비린내가 나는 거리를 걷는다. 녹색의 헐렁한 긴 팔과 청바지를 입은 나는 옷차림만 봐서는 20대와 다를 바 없다. 세상이 깜깜하니 내 얼굴이 40대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속일 수는 없어 20대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며 걷지는 못한다. 가게마다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사람 웃음소리 곳곳에서 들리니 정말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가 맞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코로나 19 팬데믹에 힘든 게 어디 나 한 명뿐이었으랴. 구부정한 자세로 바삐 걷는 내 발걸음이었지만 이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2년 동안의 그리움이었다.
나는 그녀와 약속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먼저 와 한 자리를 잡고 물을 마시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밝은 회색의 반팔과 면바지를 입은 그녀. 한 눈에도 이 가게 안에 40대, 주부들은 우리밖에 없음을 느꼈다. 20대의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목소리 톤도 20대스럽다. 물방울을 머금은듯한 생그러움이 있다. 같은 원피스, 같은 면티에 청바지를 입어도 옷 테가 나는 것은 젊음의 특권인 것 같다. 세상 걱정 없는 듯한 밝은 미소, 힘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비스듬히 앉아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햇빛 쨍쨍한 듯한 수다를 나누는 모습이 마냥 보기에 좋다.
"언니~ 벌써 와있었네요. 제가 늦었죠? 아유~ 둘째 녀석이 따라오겠다고 바지를 잡고 늘어져서 달래고 나오느라..."
"아냐. 나도 방금 전에 왔어. 뭐 먹을까?"
"언니가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오늘은 내가 사."
오늘은 내가 사! 난 사실 이 말을 너무도 하고 싶었다. 전업맘의 사정은 뻔하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에서 공과금 내고, 관리비 내고, 아이들 학원비, 생활비, 보험료 내고 나면 크게 남는 돈이 없으니 아파트 앞 커피숍에서 3000원짜리 커피를 사 마시는 것도 부담스럽다. 사정이 이러니 누군가에게 "내가 살게."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이 말을 아끼고 아끼다 오늘은 자신 있게 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니, 이럴 때라도 돈을 써보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오올~! 진짜? 나 먹고 싶은 거 다 시킨다! 어디 보자..."
그래 봤자, 우리 둘은 모두 전업맘. 통 크게 쏜다는 사람도, 통 크게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도 둘 다 자신만 아는 마음의 눈치를 본다. 누가 준 눈치인지... 어느새 소심해진 씀씀이가 못내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소고리 육전과 알탕을 주문했다. 오늘은 생일이나 소맥으로 간다. 전업맘이 되고서야 술을 배웠다. 정확히는 둘째가 두 살, 젖을 떼고 나서이다. 독박 육아의 고단함으로 스트레스가 하나하나 쌓여가던 때였다. 취미 생활도 할 수 없고 오로지 집과 마트, 놀이터만 왔다 갔다 하던 감옥과도 같은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이 행복의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외로웠고, 고단했다. 하루 24시간, 일주일이면 168시간인데 내게는 1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30분의 시간조차도. 자다 깨는 것은 몇 년째인지... 끝이 보이지 않은 육아의 시간이었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술을 배웠다. 그리고 소맥의 맛을 알게 되었다. 단맛과 쓴맛이 교묘하게 섞인 것이, 꼭 내 인생 같았다. 친근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