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읽고 나서
[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를 다시읽었다. 다시 읽으니 안보이던게 보인다. ’자유의 제한은 자유의 확대가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는 입헌주의 원칙도 보인다.
헌법 정신의 실현을 주창해왔지만, 사실 나는 근대적 입헌주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밀의 자유론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만큼 근대적 원칙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럼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에 걸친 여성주의자의 특권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같은 을에 해당하는 남성에 대한 규제’와 ‘남성성에 대한 악마화’ 를 바탕으로 자신집단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여성주의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나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이대남은 왜 동네북이 되었나]를 다시 읽었다. 쥐뿔가진거 없는 시민의 입장에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을에 대한 을의 규제‘가 여성주의를 통해서 실현되었구나를 유추할 수 있었다. 애초 좌파가 내세웠던 규제의 본질은, ‘약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강자의 특권에 대한 제동‘에 있다. 그러한 본질을 가져야 할 규제가 자신집단의 특권과 혜택을 위해 시행된다면 공법으로서 정당성이 사라진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특권을 위해서 공공의 영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파였다. 그러한 패거리 문화는, 우파의 방식이었고 우파의 오랜 실책 중 하나이자 실각의 원인이었다. 그런 우파의 방식을 신좌파들이 기꺼이 해내고 있는 격이다. 그 둘은 그래서 닮았다.
시민대중으로부터 권력을 창출하는 민주공화국에서 특정집단이 (자신집단을 위해서) 내세우는 입법안이 공법으로서 정당성을 상실했다면, 그 특정집단은 실각하는게 맞다. 다만, 실각하더라도 자신집단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한다면, 시민대중이 재평가한다. 문제는 페미니즘 진영이 근대적 원칙을 어긴걸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는 듯 하다.
근대적 원칙을 가볍게 여기는 페미니스트 진영의 본래 의도는 무엇일까. 최근들어 “페미니즘은 여성대중을 위한 이념이 아니다. 상위중산층에 속한 여성을 상류로 , 더 높은 상류로 올려보내기 위한 사상이다.”는 주장이 끊임없다. 그 주장의 근거받침이 이선옥 작가의 [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 에 많이 등장한다. 아래는 그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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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격차지수와 성평등 지수의 진실
한국은 성 격차지수 순위에서 해마다 100위권대를 기록하고 있다. 2020년에는 153개국 중 108위, 2021년에는 152개 국 중 102위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경제 규모 세계 10위인 나라 치고는 불균형적인 수치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 숫자를 보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들이 한국보다 상위권에 다수 배치되 어 있기 때문이다.
성 격차지수는 성별 격차만 비교하므로 격차가 적을수록 상위, 격차가 크면 하위에 배치된다. 만일 남녀 모두 똑같이 교육수준이 낮거나, 똑같이 높은 경우 변별력 없이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르완다, 필리핀, 남아공 등의 국가가 왜 세계 6위, 8위, 19위 등의 상위 권을 차지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은 교육수준, 질병과 건강 등의 지표에서 격차가 거의 없지만 정치인 비율, 고위임원 비율에서 여성이 낮아 하위권에 위치한다. 이런 요소 때문에 성 격차지수는 성차별 정도를 판단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반론이 꾸준히 나왔음에도 페미니스트 진영은 여전히 세계 100위권이라는 선정적 숫자에 기대 비윤리적 선동을 하고 있다.
자신의 사회적 발언에 조금이라도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전으로 남성들이 죽어 여성들이 정치와 경제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국가, 남녀 모두 교육의 기회가 낮은 국가들보다 한국이 100위권 밖 수준으로 성차별이 심각하다는 주장을 펴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해당 통계의 근거가 되는 항목과 산출기준에 대한 정보들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스트 진영은 성 격차 지수를 이용해 한국이 세계 최하위권의 성차별 국가라는 선동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무책임하며 비윤리적인 행태이다.
우선 필자는 세계 몇 위라는 순위로 성평등, 성차별 여부를 판단하는 통계를 유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판단을 하는 데 참고하는 수준으로 활용할 뿐이다. 가령 임금수준이 높고 보육지원이 잘 되는 국가에서 여성들이 경제활동보다 육아에 전념하는 선택을 더 많이 한다고 할 때, 외부적인 데이터로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낮으므로 성차별 국가로 평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전업주부를 선택 하고 그 삶에 가치를 두고 만족한다면 성차별국가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통계에는 이러한 함정이 있으므로 어떠한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보조적 자료로 쓰더라도 자의적인 해석이나 왜곡에 대해서 늘 경계하는 것이 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책임있는 태도다.
성 격차지수와 달리 유엔개발계획 UNDP에서 선정하는 성 불평등지수를 보면 한국은 2020년 기준 189개국 중 11위, 아시아 1위이다. 해마다 이 순위를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진영은 이 통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국의 정부 또한 마찬가지다.“
이선옥 저 , [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 담담, 14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