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1901-1938).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며 헌신한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조선공산당 창립과 그 중심에서 활동, 그리고 코민테른과의 긴밀한 연계는 그의 삶을 특징짓는 요소이며,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하다.
김천에서 움튼 민족의식
김단야는 1901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의 중농 가정에서 출생했다. 부친 김종원은 한때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일제강점 이후 그 자격을 박탈당하고 농업에 종사한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은 어린 김단야에게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그는 개진학교, 진명학교, 영진학교를 거쳐 1915년 대구 계성학교 고등보통과에 진학했다.
계성학교 동맹휴학과 독립운동의 발화
계성학교 재학 중, 김단야는 일본인 교사와 미국인 선교사 교장의 차별적 처우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1916년 퇴학 처분을 받는다. 이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이후 1917년, 그는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하는 한편, 같은 해 서울 배재학교에 입학한다. 1919년에는 비밀결사 단체에서 활동하며 <반도의 목탁>이라는 비합법 신문을 발행하였고, 3·1 운동 당시에는 고향 김천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태형 90대의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상하이로의 망명과 사회주의 운동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김단야는 박헌영, 임원근 등과 조우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이들은 후일 '상하이 트로이카'로 불리며 함께 활동했다. 당시 상하이는 중국혁명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의 혁명가들이 집결하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김단야는 국제적인 사회주의 사조를 접하고, 다양한 국적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시야를 확장했다.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고 기관지 <벌거숭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등 청년운동을 주도한다. 특히, 그는 언론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김단야는 단순한 민족주의 운동가에서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사회주의 혁명가로 변모하게 된다.
조선공산당 활동과 코민테른과의 심층적인 연계
김단야는 1925년 국내 조선공산당 창립에 핵심인사로 참여한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결성되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사상적 편차와 파벌 간의 갈등이 상존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김단야는 당의 조직을 정비하고, 대중운동의 확대를 모색했다. 특히, 그는 코민테른과의 연계를 중시하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코민테른은 전 세계 공산당들의 국제적인 조직으로서, 각국의 독립운동 및 사회주의운동을 지원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필요한 자금 및 물자 지원을 요청한다. 그는 모스크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직접적으로 근무하며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쟁의 중요한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김단야는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독립운동의 전략과 방향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코민테른과의 긴밀한 연계는 훗날 스탈린의 대숙청이라는 피바람 안에서 그에게 비극을 안긴다.
스탈린 대숙청의 희생양
1930년대 중후반, 소련은 스탈린의 철권통치 아래 대숙청이라는 광풍을 맞이한다. 이는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한 숙청으로, '인민의 적', '반혁명 분자',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 스파이' 등 광범위하고 모호한 혐의를 씌워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 투옥,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즉결 처형했다. 이러한 숙청의 칼날은 소련내부의 당, 군, 정부기관뿐 아니라 코민테른과 연계된 해외 사회주의자들에게까지 가차 없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세력확장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코민테른은 일본과 관련된 인물들을 잠재적인 스파이로 의심하는 편집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 에서 김단야는 코민테른과의 관계, 그리고 일제치하 조선출신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숙청의 표적이 된다.
김단야는 1937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받고 소련 비밀경찰 NKVD(내무인민위원회)에 체포된다. 이후 어떠한 정식재판이나 적법한 절차도 없이, 오직 정치적 필요와 숙청 목표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으로 추정된다. NKVD의 심문과정에서 어떠한 고문과 강압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숙청과정에서 자행된 잔혹한 행태들을 고려할 때 극심한 고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38년 2월 13일, 김단야는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숙청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소련이 붕괴하자 유가족들은 그제서야 김단야의 최후를 알게 된다. 이념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스탈린의 대숙청은 이념이 불러올 수 있는 광기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며, 김단야는 그 가운데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인물이다.
망각되어서는 안 될 이름, 김단야
김단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조국의 독립과 사회변혁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던 혁명가다. 그의 헌신과 불굴의 정신은 우리 역사의 한 단락을 매웠다. 그의 삶은 광기어린 이념 대립 가운데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으나, 2007년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며 그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훈장 추서가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는 김단야와 같은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저항정신을 기리는 노력을 지속해야한다. 그의 삶과 정신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숙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단야, 그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면 좋겠다.
* 참고자료
디지털김천문화대전 : 김단야 - 디지털김천문화대전
지역N문화: 항일사회주의자 김단야, 스탈린의 광풍에 스러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겨레 : 조선의 혁명지도자, 스탈린 비밀경찰에 희생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