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지키다 권력을 잃은 혁명가
통장잔고 16,000원. 정의당 지역위원장직 사퇴. 2022년 5월, 나의 처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문장이다. 동료는 넌지시 "5개월만 더 버티지."하는 아쉬운 소리를 하더라. 그말에 나는 그냥 넋놓고 커피나 홀짝인다. 그냥... 못 버텼다. 가난 때문이기도 했고, 외로움 때문이기도 했고, 무능 때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약했다. 그런 나는 트로츠키를 좋아한다. 자기애가 흘러넘치는 면모가 상당히 거슬리지만서도 끝까지 자기사상의 원칙을 지키다가 권력도, 고국도, 목숨까지 잃은 혁명가로서의 면모는 나를 매료했다. 그를 닮고 싶었으나, 나는 그를 닮지 못했다. 닮고 싶지도 않다.(솔직히 좀 무섭다) "왜 트로츠키는 위험한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갔을까?" "뭐가 그렇게 중요했을까?" "나랑 뭐가 달랐을까?" 이 연재에 트로츠키를 언급하는 건 트로츠키를 찬양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실패한 청년정치인이 갈데까지 간 혁명가를 기억하고 싶어서 쓴글이다.
요즘은 ‘너 MBTI 뭐야?’로 사람을 묻곤 한다. 100년 전엔 “너 사상 뭐야?”가 같은 기능을 했다. 그런데 그때의 ‘사상’은 목숨을 건 소속감이었다.
1940년 8월 20일, 멕시코시티. 트로츠키는 자신의 서재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스페인 공산주의자로 위장한 소련비밀경찰요원 라몬 메르카데르가 도끼를 휘둘렀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트로츠키는 하루를 더 버티다 사망했다. 향년 60세. 러시아혁명을 레닌과 함께 이끌었던 혁명가의 최후치곤 초라했다. 망명지를 전전하다 결국 암살당한 것이다.
그는 평생 이론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고, 그래서 패배했다. 반면 스탈린은 권력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그래서 이겼다. 누가 옳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트로츠키가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왜 타협할 수 없었는지, 무엇이 그를 권력보다 원칙을 선택하게 만들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해는 지금도 좌파운동내부에서 논쟁거리다. 그런데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유럽사회에서 '이즘(~주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시 유럽지식인들에게 사상은 삶의 방식이자, 정체성이었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만하던 그 무엇이었다. 당시 정당은, 단체는 마르크스주의, 아나키즘, 민중주의 같이 그러한 정체성을 선택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했다.
요즘 MBTI 묻듯이 "너 사상이 뭐야?"라고 묻던 시절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때 사상은 성격테스트에 멈추지 않고 '목숨을 건 소속감'이었다는 거다. 어떤 주의(Ism)를 택하느냐에 따라 내 친구가 정해지고, 내 적이 정해지고, 결국 내가 죽을 자리까지 정해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우리가 잘알다시피 이는 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는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계몽주의 이후 신 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중세에서 벗어나 과학과 사람의 생각, 이성이 세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가 되면서, 지식인들은 '과학적' 사회이론을 통해 반복되던 역사의 법칙을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부른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사회의 내적모순을 분석하면 필연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이 온다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특정 ~이즘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편에 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사상논쟁은 진리의 상대성을 전제로 두지 않은 학술토론에 멈추지 않고 생존을 건 투쟁이 되곤했다. 오늘날의 우리도 흔히 학문이나 사상이 진리를 탐구하는 분야라고 생각하지않나. 그 진리가 이데올로기로다. 그 이데올로기가 사람잡는 시기였다. 내가 옳으면 상대는 틀렸으니, 제거하거나 먹고살길을 틀어막아야만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레닌주의처럼 인물의 이름이 곧 사상의 이름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상은 참고해야할 이론에 멈추지 않고 특정인물의 실천과 선택, 그리고 그 인물이 이끈 조직과 운동을 통해 구체화됐다.
바로 이런 시대에 트로츠키는 태어나 자랐다. 1879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농장주집안에서 태어난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테인(트로츠키는 나중에 쓴 필명이다)은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문맹이었지만 땅을 일궈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어린 트로츠키는 오데사의 독일인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유럽문화를 접했다.
1896년, 17세의 트로츠키는 니콜라예프에서 민중주의서클에 가입한다. 처음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농민중심의 혁명론을 신봉했다. 이는 당시 러시아청년지식인들 사이에서 흔한 경로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서유럽에서 수입된 '외래' 이론으로 여겨졌고, 러시아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설득당하는 경험을 한다. 그 마르크스주의자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배운 여성이었다. 소콜로프스카야는 "러시아에도 이미 공장이 생기고 공장노동을 전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농민만 보고 노동자를 외면하는 건 현실을 못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젊은 트로츠키에게 이 경험은 충격의 충격이었다. 첫째, 자신이 신봉하던 민중주의가 변화하는 러시아현실을 제대로 보지못하고 있다는 각성. 둘째, 여성지식인에게 논쟁에서 진 경험 그러니까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이는 지적겸손을 배우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그 여성의 논리에 설득됐고, 둘은 1899년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결혼한다. 이미 그때부터 트로츠키에게 사상선택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1902년 트로츠키는 유배지를 탈출해 런던으로 향한다. 여기서 레닌을 처음 만난다. 레닌은 이 23세청년의 문필력과 웅변술에 감탄했다. 당시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902)를 막 출간한 상태였다. 이 책에서 레닌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전위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대중은 놔두면 월급 올려달라는 소리밖에 안 한다. 그러니까 똑똑한 엘리트(전위)들이 앞에서 끌고가야 한다." 반면 트로츠키는 "그렇게 하면 독재일 뿐이다"며 맞섰다.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의 예상이 적중한다. '나를 따르라'는 리더십은 결국 '나만 따르라'는 독재로 변질되기 쉬우니까. 일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인 노조의식(경제투쟁 의식) 수준에 머물 뿐이고, 진정한 계급의식은 외부에서, 즉 정당이 주입해야 한다는 논리는 트로츠키에게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다. 결국 전위정당론은 정치에 있어서 대중을 객체로 두는 관성으로 작용해, 소련공산당은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나뉜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에 가까워졌지만 곧 독자노선을 걸었다. 다수파에 있던 레닌의 엘리트주의노선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본 것이다. 트로츠키는 "정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할 수 없고, 중앙위원회가 정당을 대신할 수 없으며,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기조는 훗날 스탈린주의와의 대립에서도 주요한 논리가 됐다. 이 선택은 트로츠키를 당론을 거스르는 반동분자 내지는 불순분자라는 꼬리표가 된다. 또한 이러한 꼬리표는 1920년대 공산당내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트로츠키는 원래 멘셰비키였다. 볼셰비키의 진정한 동지가 아니다."는 식의 공격이 이어졌다.
1905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동궁 앞에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군대가 발포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 파업과 봉기가 확산됐다. 트로츠키는 가짜여권으로 러시아에 잠입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 의장이 됐다.
여기서 그는 소비에트, 즉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평의회가 혁명의 조직형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정당중심의 레닌식 모델과는 다른 길이었다. 소비에트는 공장별, 지역별로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됐고, 파업지도는 물론 사실상의 이중권력기능까지 수행했다.
트로츠키가 보기에 이거야말로 노동계급의 자발성과 조직화가 결합된 형태였다. 레닌의 전위당이 '위에서 아래로' 의식을 주입하는 구조라면, 소비에트는 '아래에서 위로' 권력이 올라오는 구조였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은 실패했다.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두마(의회) 개설을 약속하며 자유주의자들을 포섭하고,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체포되어 다시 시베리아로 유배됐다가 1907년 탈출에 성공했다.
유럽 망명생활 중 트로츠키는 1905년 혁명의 경험을 이론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영구혁명론'이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정설은 분명했다. 혁명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부르주아혁명(자본가혁명)이 일어나야 하고,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뒤에야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마치 게임의 튜토리얼을 다 깨야 본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트로츠키는 이 정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의 영구혁명론의 골자는 이랬다.
핵심은 '불균등결합 발전'이었다. 후진국 러시아에 최첨단 공장이 들어서고, 봉건적인 농촌 한가운데 최신식 철도가 달리는 모순. 이 모순이 가시권 안에 들어오며 혁명의 촉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첫째, 러시아처럼 자본주의가 덜 발달한 후진국에서도 부르주아혁명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부르주아지는 너무 약하고 비겁해서 차르전제정을 타도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노동자봉기를 두려워해 차르와 타협할 것이다.
둘째, 노동계급이 농민과 연합해 권력을 장악한 뒤, 서유럽선진국의 혁명을 촉발시켜야 한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완성될 수 없으므로, 혁명은 필연적으로 국제적으로 확산돼야 한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