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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은 싸워서 만드는 것이다

감옥에서 세상을 바꾼 꼽추의 전략

by 백재민 작가

1891년 이탈리아, 안토니오 그람시는 유년시절부터 세상의 험함을 체감했다. 일곱남매 중 넷째, 아버지는 횡령 혐의로 투옥됐고 가족은 극빈층으로 추락했다. 네 살 때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사고로 척추가 손상됐으나 가난한 집에서는 치료받을 엄두조차 못 냈다. 성인이 된 그의 키는 150센티미터, 등은 깊이 굽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일 고보', 꼽추라 불렀다.


열한 살, 또래가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울 나이에 그람시는 토지등기소에서 하루 열시간씩 무거운 서류를 날랐다. 책가방 대신 서류더미를, 교과서 대신 부동산문서를 다뤘다. 굽은 등에는 서류 무게가 더해졌고, 작은 키 때문에 선반 위 문서를 꺼낼 때마다 의자를 끌어와야 했다. 동료들의 비웃음, 민원인들의 경멸 어린시선, 상사의 퉁명스러운 지시. 그렇지않아도 정상 범주에 벗어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그람시를 사회울타리 밖에서의 투쟁으로 이끈다. 험한 세상이 돌아가는 작동원리를 일찍이 배운셈이다. 가난하면 똑똑해도 배울 수 없고,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며, 사회울타리 밖에서 힘없는 이는 짓밟힌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몸소 체감한다.


그람시의 아내 줄리아 슈히트와 아들들

그람시는 밤마다 등잔불 아래서 형이 구해준 사회주의서적을 읽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을 읽으며 울타리 밖에서의 투쟁정신을 제도화할 방법을 탐구한다. 그람시가 읽던 마르크스에는 노동계급이 곧 붕괴될 자본주의사회에서 권력을 얻을 것이라 논증한다. 그를 지원하던 엥겔스는 역사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간다고 했다. 레닌은 그 사회주의를 위해 전위당(엘리트선봉대)이 혁명을 이끌 것이라 했다. 그런데 왜 토지등기소 노동자들은 자신을 갈구는 상사에게 순종할까? 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없는 시스템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책과 현실사이의 간극이 그를 괴롭힌다.


1911년 그람시는 토리노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다. 토리노는 그람시의 고향과는 다른세계였다. 이탈리아 근대화의 심장부, 피아트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끊이질 않는 도시였다. 그람시는 언어학을 전공했으나, 정작 마음이 향해있는 곳은 피아트공장 앞이었다. 당대 이탈리아노동자들은 하루 열두시간 일했고, 임금은 적었으며, 산재는 빈번했다.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랐다.

토리노대학

그는 대학과 공장사이를 오갔다. 아침에는 단테를 읽었다. 저녁에는 노동조합집회에서 연설했다. 주말에는 노동자가 모인 야학에서 문해법을 익히는 교육을 했다. 그 교육으로 느낀바가 있었나보다. 상층구조로부터 그렇게 무시받던 노동자들은 무지하지 않다. 그람시가 만났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기계를 다루면서도 동료들과 협력하며 실생활에 닥친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배운바로는 그게 지식을 습득하는 목적이었다. 다만 노동자들의 지식은 체계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체계화되지 않은 경험과 직관, 실생활에서 받는 무시로 느낀 단편적인 분노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얻은 희망을 연결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그람시가 읽었던 혁명가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소양이었다.


어렵사리 현장과 이론을 넘나들던 그람시는 1917년 러시아혁명 소식을 접한다. 당대에서 사회주의로 경도되어있던 노동자들은 그람시와 함께 환호한다. 그들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이론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이론과 실천으로서 노동계급이 권력을 가져야된다는 마르크스주의가 레닌과 러시아 대중을 통해 실현됐다. 차르중심의 전제정이 무너졌다. 그람시는 즉각[새로운 질서] 라는 신문을 만들어 공장평의회 조직을 제안했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운영하는 평의회, 공장업무의 애로사항을 규합하고 대표를 내세워 책임지게 함으로써 민주적으로 생산을 관리하고 월급을 조율하고 직장이 나아갈 미래를 내다보는 조직을 만들어야한다는게 주장의 골자였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붉은 2년'동안 토리노지역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했고 그람시는 그 한가운데서 연설했다. 수만명의 노동자가 공장마당을 가득 메웠다. 당시로서는 비장했을 적기가 펄럭였고 가시권에 들어온 억압에 분노를 억누르며 살았던 구호가 마당가득 울려퍼졌다. 혁명이 눈앞에 있는 듯 벅차올랐다.

1919년, [새로운 질서]. 출처 : 반디뉴스

하지만 혁명은 오지 않는다. 파업은 무력으로 진압됐다. 가까스로 규합했던 평의회는 해산됐다. 노동자들은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이 시기의 그람시는 좌절한 모양이다. 그 시기 그람시는 러시아에서는 성공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왜 실패했을까?하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구에 몰두한다. 업무면에서나 운동에서나 토리노 노동자들은 분명 최선을 다했다. 평의회까지 조직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이론에 따른다면 누락된 요소가 없어보였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 그렇게 지지부진한 성과와 비루한 일상이 이어지고 어느덧 1922년 무솔리니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여러 성난 군중이 두려웠던 이탈리아 왕실이 무솔리니에게 정부운영권한을 넘긴다.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았다.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카리스마있는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즘을 지지했다.

무솔리니

파시즘이 생겨나서 국가사회주의가 나타났다는 좌측 이론과 사회주의의 발흥과 그에 대한 역효과로 파시즘이 탄생한다는 우측의 이론은 아직 뜨거운 감자처럼 논쟁적이다. 그람시는 그 좌측의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한다.


그람시는 노동계급이 파쇼를 지지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당대에 유행하던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이론가라면 한번 쯤 가질만한 감정이다. 그리고 1926년 11월 8일, 그는 체포된다. 재판정에서 검사는 그람시의 머리를 가르키며 이렇게 말한다.


이 머리가 20년간 작동하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이탈리아 파쇼가 두려워한 것은 굽은등의 작은사내가 아니라 그의 생각이었다. 감옥문이 닫혔다. 좁은 독방, 습한공기, 부실한식사. 망가진 척추는 더 비틀렸고 두통과 불면증이 괴롭혔다. 밤마다 이를 갈며 고통을 견뎠다. 의사는 왔지만 제대로 된 진료는 없었다. 간수들은 그를 '교수님'이라 비꼬듯이 불렀다. 바깥에서는 파시즘을 칭송하는 노래가 흥얼거리며 승리를 구가했다. 그람시의 동료들 역시 투옥되거나 망명했다. 명백한 패배였다.


하지만 감옥이 오히려 깊이 생각할 시간을 줬다. 행동할 수 없게 되자 생각이 많아졌다. 노트를 펼치고 연필을 들어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왜 러시아혁명은 성공했고 이탈리아혁명은 실패했을까? 차이는 뭘까? 그람시는 두사회의 구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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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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