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하와이, 한국인 군대 300명은 누가 해체했나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 후미진 골목에서 마흔일곱의 한국인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스물여섯 의열단원 이해명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쓰러진 남자에게 외쳤다고 한다. "밀정은 죽어야 한다."
쓰러진 남자의 이름은 박용만이다. 20년 전 미국 네브래스카 옥수수밭 한복판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운 사람. 14년 전 하와이 오아후섬에 300명 규모의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한 사람.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지도자로 꼽히던 이름이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 내각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된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베이징 뒷골목에서 같은 민족 청년의 총에 죽었다. 신문은 며칠짜리 단신으로 이 사건을 처리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한동안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이름이 되었다. 당대를 살던 사람에게 박용만의 부고는 슬프다기보다 민망한 소식이었다. 자기 편 하나가 자기 편 손에 죽었는데, 배신 때문인지 모함 때문인지 누구도 단정하지 못했다.
박용만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박용만은 일본 게이오의숙에서 유학한 뒤 구한말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감옥에서 그는 두 사람을 만난다. 이승만, 그리고 정순만이다. 셋 모두 이름자 끝에 '만'이 걸려 있었기에 주변은 이들을 '옥중 삼만'이라 불렀다. 같은 감방에서 출발한 세 청년은 이후 갈라진다. 정순만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암살된다. 박용만은 1928년 베이징에서 밀정으로 몰려 암살된다. 이승만은 1948년
초대대통령이 된다.
옥중 삼만 중 끝까지 살아남은 한 사람이, 나머지 두 사람에 관한 공식 기록을 관장하는 자리에 앉은 셈이다. 당시를 살던 누구도 세 청년의 운명이 이렇게 정리될 줄 몰랐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셋중에서도 유독 가까웠다. 이승만이 먼저 조지워싱턴대·하버드·프린스턴을 거쳐 박사학위를 받는다. 박용만도 뒤이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두 사람은 네브래스카에서 한때 함께 생활했다. 서로의 글을 신문에 소개해주는 사이였다.
1909년,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운다. 재미 한인노동자의 자녀와 유학생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는 학교였다. 여름에는 총검술·사격·제식훈련을 받았다. 학기 중에는 일반교과를 이수했다. 규모는 30~40명 안팎. 운영비는 한인 농장주의 기부와 학생들이 여름철에 번 임금으로 충당됐다. 미국 중서부 옥수수밭 한가운데에서 조선 청년들이 나무총을 들고 제식훈련을 했다. 1910년대 미주한인사회가 독립을 위해 만들어낸 가장 구체적인 기획 가운데 하나였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마냥 장엄하기만 했을까 싶다. 학교라고 해도 교재가 넉넉하지 못했다. 훈련을 지도할 장교 출신 인력도 제한적이었다. 졸업생이 당장 돌아갈 독립군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30~40명 규모의 병사가 수년 뒤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제국군과 실제 교전한다는 전망은, 냉정히 말해 당대 현실감각으로 받아들이기 벅찼다. 박용만 본인도 이 한계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시작했다.
박용만의 구상은 '둔전병제'로 요약된다. 농장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군사훈련을 병행한다. 유사시 이들이 독립군 기간요원이 된다는 계획이었다. 1911년 그는 《국민개병설》을 펴낸다. 골자는 분명했다. 국민 모두가 병사가 되어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 외교로 독립을 얻는다는 발상을 그는 환상으로 규정했다. 강대국은 총을 가진 자의 말만 듣는다. 총 없는 민족의 청원은 국제회의 의제로 오르지도 못한다. 이것이 박용만의 전제였다.
이 전제가 이승만과의 결정적 분기점이 된다.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자였다. 미국을 설득해 독립을 얻어내자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당대 해외 한인사회가 마주한 근본 딜레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 영토 안에서 외국인이 군대를 조직해 일본과 싸우겠다는 발상은 당대 국제사회의 현실정치에 있어서 지극히 불안정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미국정부는 자국 내 외국인의 군사활동을 강하게 경계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마침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박용만의 노선은 합법과 비합법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었다. 이 긴장은 훗날 그가 중국에서 일본 측과 접촉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진다. 하와이 한인사회 안에서도 박용만의 군단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동시에 "저러다 미국 눈 밖에 나면 우리 식구들은 어쩌나" 걱정하는 목소리가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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