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급함이 부르는 이른 결정

시각만 보고 정하면, 근거는 비어 있다.

by Yooseob

수업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다.

학생이 공들여 모아온 레퍼런스 이미지를 책상 위에 펼친다.

그러면 교수님이 그 자리에서 색·서체·형태를 곧바로 정해준다.

학생들은 ‘자료를 잘 찾았다’는 뿌듯함과 ‘방향이 빨리 정해졌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 과제는 이유를 잃는다.

Illustration Created w/ chat GPT

이렇게 결정된 작업은 시각적인 틀 안에서만 움직인다.

아이디어의 출발점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보일까’가 되면,

결과는 레퍼런스를 닮은 안전한 길로만 향한다.

겉으로는 깔끔하고 완성도 있어 보여도,

“이 디자인이 문제를 푸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대답이 짧아진다.


문제는 이런 경험이 학생 시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무에 나가서도, 트렌드 이미지를 몇 장 뽑아 클라이언트 미팅 자리에서 바로 시안을 확정하는 습관으로 이어진다.

빠른 결정은 일시적으로 신뢰를 줄 수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확신은 수정 과정에서 큰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


학생 때는 이른 결정이 배우고 실험할 기회를 빼앗는다.

제출은 빠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도 설득되지 않는 결과로 남는다.

실무에서는 그 대가가 더 크다.

방향이 일찍 고착되면 수정이 단순 변경이 아니라 ‘재작업’이 된다.

둘 다 뒤로 갈수록 바꾸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나는 학생과 디자이너 모두에게, 결정의 타이밍을 다시 잡자고 말한다.

처음에는 ‘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묻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문제를 정의하고, 사용자·맥락의 가설을 세운 뒤,

저해상도 시안으로 여러 가능성을 시험하고,

겹치는 지점에서 천천히 방향을 고정하는 것이 좋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은 게 아니다.

검증을 거친 결정이 결국 더 단단하고 오래 간다.

학생 때 익힌 빠른 결정 습관이 실무에서 발목을 잡지 않도록,

빨리 정한 디자인보다 잘 정한 디자인을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4. 조급함이 세대를 건넜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