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휴가를 허락한다
마지막으로 해외에 갔던 것은 2019년 미국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겐 꽤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일이 현실이 된 것처럼 전 세계에 전염병이 돌았고 그러기 직전 내 인생에서도 남일로만 여겼던 사건이 생겼으니...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상견례까지 치렀던 사람과의 인연이 한순간 '끝!'
차갑고 무뚝뚝하게 툭 내뱉아진 말처럼 끊어져버렸다.
내 마음도 그렇게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하고 덜렁 간신히 붙어 남은 딱지 아래서 한참이나 피가 배어나고 아렸다. 이별엔 반드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데 지긋지긋한 애도를 마치고 나면 약간의 깨달음도 얻고 더 성숙한 내가 되어 상쾌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란 바람과는 달리, 그 기간이 만났던 시간의 두 배 이상이 걸리는 나 같은 사람은 결국 너덜너덜해진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생각보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된 대가라긴엔 희생이 너무 크다. 하루아침에 다 털어버리고 싶은 바람과 달리 풀리지 않는 의문들과 상대인지 나인지,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원망들로 한동안 머리가 뒤죽박죽 제정신이기 어려웠다. 길을 걷다가 영문도 모를 눈물이 흘러 당황스러운 날들이었다. 파스락 파스락 얇아질 대로 얇아져 자칫 부서지고 흩어져 사라질 것 만 같은 마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쥐어보려 애를 썼다. 어차피 준비한 것 계획대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는데 팬데믹으로 대사관이 문을 닫아버렸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일단 대학원을 진학하려 했던 분야의 관련 실무경력을 쌓자 싶어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나이에 민감한 우리나라에서 적지 않은 나이에 커리어를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너무 늦은 걸까? 그만 포기해야 하려나?' 싶을 때쯤 운이 좋게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근 4~5년 동안의 내 인생은 꽤나 다이내믹했다.
스무 살 즈음 내가 상상했던 나의 30대와 실제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니 이런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다들 최악의 상황은 남한테만 혹은 드라마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니깐...
나도 그랬다. 전에 결혼식 날짜까지 다 잡은 대학동기의 결혼이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내가 가깝게 알던 사람한테서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는데 (나는 결혼식 날짜를 잡지는 않았지만) 내가 이런 일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30대 중반 이후에 몇 번씩 뭔가를 해내기 위해 도서관 문이 닫을 때까지 공부하며 치열하게 살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신건강학 관련 유튜브나 책에서만 들어본 소시오패스를 회사에서 상사로 만날 줄도, 회사 가는 매일이 너무 지옥 같아서 울면서 출근하는 사람이 내가 될 줄도 몰랐다. 모두의 일상이 치열하긴 하지만 적어도 전반적인 내 30대 중반 이후의 나날들이 현실의 것보단 더 잔잔하고 덜 외로울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아... 작년여름은 날씨마저 유난히 견디기 어려웠다. 살다 살다 그렇게 덥고 습한 여름은 처음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진심으로 지구온난화로 지구가 곧 종말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Global Boiling'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사계절이 아닌 '우기'와 '건기'로 한해를 구분지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뉴스에서 들려왔다. 심하게 뜨겁다가 종종 사나운 비가 내렸고, 지겹게 길다 싶은 여름이었다.
여름휴가기간에 휴가를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움직이기도 힘든 여름에 휴가를 가는 제도를 만들었을까? 에어컨이 빵빵하다 못해 냉방병을 걱정해야 하는 사무실을 두고 말이지. 물론 '휴가'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휴가 하면 일단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로선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 끝나갈 때쯤 늦은 휴가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종종 버거웠던 지난 몇 년을 그런대로 버텨낸 나에게 주는 작은 상이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물리적으로) 최대한 멀어지는 것, 해외여행.
떠나자.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