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가치를 지키는 유연한 버팀
무엇을 지키려는 의지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절벽 위의 마을 타오르미나의 자연경관을 보았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두 성문 사이를 연결하는 코르소 움베르토 거리를 걸어 꼭대기에 이르면 그리스식 원형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이 철학적이고
아를의 원형극장이 구조적이라면
타오르미나의 원형극장은 드라마틱하다.
수많은 자연재해와 침략 속에서 도시를 요새화시키면서 극장을 목숨걸고 지켜낸 공동체의 힘이 그렇다.
활화산인 에트나 산과 푸른 지중해의 자연경관이 배경이 되고, 고난의 흔적을 간직한 기둥과 돌들이 소품이 된 극장의 무대가 그렇다.
지금도 국제행사와 콘서트가 열리는 문화의 장으로 고대로부터 지속되어 온 예술의 정신이 그렇다.
지중해를 따라서 또 다른 색의 마을 카프리섬을 만났다.
카프리 가던 날은 오전에 폼페이를 방문하고 나폴리를 거쳐 오후에 카프리로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폼페이의 우울한 정막함에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카프리에 오자 햇살 가득한 생기와 관광객들의 북쩍대는 소리가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카프리하면 두가지를 떠올린다. 추억의 영화 '일포스티노'와 '레몬'.
항구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서 카프리타운 광장을 지나 구시가지를 걸었다.
확 트인 전망의 지중해 바다와 바위, 흰색 벽돌과 어디를 가나 풍기는 레몬향이 이국적이다.
타오르미나가 장엄하다면 카프리는 화려하다.
화려하지만 허영스럽지 않고, 좁은 골목마다 빽빽하게 늘어선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은 소란하지 않다.
카프리의 화려함에는 절제와 질서가 배어있다.
그 어떤 것도 있는 섬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며 자연이 주는 여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이 섬의 정체성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 그 본질이 많이 깨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고요한 안식과 우아한 삶의 방식을 누리기에는 관광객이 너무 너무 많다.
도시를 색으로 표현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앞서 2장에서 말했듯이 코토르는 검은 그을음이 스민 회백색, 타오르미나는 주황빛 감도는 붉은 벽돌색이고, 카프리는 레몬옐로우, 지브롤터는 슬레이트 그레이에 가깝다. 도시 특성에 따라 떠오르는 색감이 있다.
지중해를 배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 자체가 하나의 팔레트이고 파스텔톤의 컬러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이탈리아의 포르토베네레(Portovenere)를 시작으로 친퀘테레(Cinque Terre)의 다섯마을로 이어지는 공동체가 그것이다.
포르토베네르는 크루즈 여행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친퀘테레(Cinque Terre)의 다섯마을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으며, 절벽이 바다수면과 포개지면서 사라지는 그 절벽 끝에 홀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올리브색, 피치색, 코랄과 옐로우가 섞여있는 마을 끝에는 성 베드로 교회가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는 시인 바이런이 시적 영감을 받기 위해 왔었다는 해안동굴(바이런 동굴)이 있다. 다크그레이 절벽이 파스텔 마을과 조화를 이루고, 지중해 빛이 스며든 딥 블루색 바다는 고독과 낭만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숨은 진주같은 곳이다.
포르토베네레에서 배를 타면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에 순차적으로 정차하여 승객들을 태우고 내린다.
바다 위에서 절벽 위 마을을 바라보면 세이지 그린, 피치베이지, 머스터드옐로, 코랄핑크, 만다린 레드 컬러가 리듬감있게 붙어서서 손흔들며 인사하는 것 같다.
그렇게 1시간 배를 타고 친퀘테레의 마지막 정거장인 몬테로소(Monterosso)에 도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마을에 도착해서 처음 든 생각은 '멋있다'가 아니라 '낡았다'였다.
외벽은 색이 바래고 균열이 있으며 전선이 건물을 가로지르고 집들이 다닥이 붙어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이 곳은 낡음 그 자체가 풍경이 되어 존재하는 마을이다.
사진으로 보았던 활기차고 예술감 넘치는 색채와 실제 방문해서 보는 삶의 흔적들은 확연하게 대비가 된다.
나보고 여기서 살겠냐고 하면 현실적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이 곳 주민들이 이 곳을 포기하지 않았다.
절벽 위의 친퀘테레 다섯 마을들은 위치적으로는 서로 고립되어있지만 바다와 연결된 연대감이 있고 공동의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절벽 위의 파스텔 마을을 가까이에서 보면 자연의 풍파와 고립된 삶 속에서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며 응집된 연합공동체임을 느낄 수 있다.
실제 집을 형형색색 컬러로 만든 것은 마을의 어부들이 바다에서 돌아올 때 자기 집이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색은 이 공동체의 정체성이다.
그리스의 지중해는 이탈리아의 바다와 색이 다르다.
코르푸(Corfu)의 '파란눈(Blue Eye)'을 보면 동굴에 비치는 빛의 명암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는데 에메랄드 빛과 터키블루와 짙은푸른색이 여러 층을 이루며 섞여서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인간이 만들어내거나 사진에 담아 표현할 수 있는 색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술적인 손길이 느껴진다.
친구에게 사진을 보냈다.
'아! 인어공주가 튀어나올 것 같아'
코르푸 섬은 수세기동안 외세가 오가며 지배했기에 구시가지에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가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신앙과 평화를 수호해 온 절벽 위의 팔레오카스트리차 수도원과 유유히 바다 위에 떠 있는 블라헤르나 수도원, 그리고 에메랄드 빛 바다와 자연의 조화가 코르푸를 요새의 섬이 아닌 아름다운 푸른 지중해 섬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것은 현지가이드가 몇 번이나 영화 007 Your Eyes Only와 My Big Fat Greek Wedding의 배경이 된 장소라고 강조하면서 영화의 장면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007시리즈 본지 오래되어 기억이 안난다. My Big Fat Greek Wedding은 한번 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못보고 있다.
아지오스 스피리돈 해변에서 배를 타고 Blue Eye Cave를 들러 30분 간 해변투어를 했다. 그리스 현지 보트맨이 특유한 엑센트의 그리스식 영어로 코르푸의 해변과 배경을 설명을 해준다.
코르푸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전세계 부호들과 셀러브리티가 많다는 가이드의 설명보다 흥미롭고 감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관광 마치고 해변가로 돌아온 후 보트맨이 뱃머리의 두툼한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동료들과 그리스어로 큰소리로 대화를 나누더니 호탕하게 웃는 장면이다.
무슨 말을 주고 받은 것인지 이해는 못하였지만, 지중해와 해변과 배와 현지 보트맨과 그리스어 이 조합이 영화에 자주나오는 한 장면처럼 매우 친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존을 위해 '보트맨'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배에서 내리는 순간 그 땅에서 평생을 살아온 삶이 배어있는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와서 '살아있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지금 그대로의 현실을 사랑하고 그 여유와 웃음 속으로 삶의 애환을 바다에 떠나보낸다.
이것이 내가 느낀 이 섬의 정체성이다.
버팀은 강직함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부러지지 말고 휘어질 줄 아는 유연함도 버팀의 방식이다.
고난을 끌어안으면서도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 유연함이 회복탄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