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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Oct 14. 2023

엄마와 함께하는 40분의 타임머신

바빴던 엄마와의 등굣길.

 


<엄마는 이제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2학기 들어 요즘 나의 등굣길은 많이 특별하다. 달라진 날씨, 달라진 시간표, 달라진 옷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기존의 것과 ‘달라진’ 것일 뿐이지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내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20년 넘게 초등학교 교사로 일을 하셨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양한 나잇대의 어린 친구들의 담임을 맡기도 하셨고, 때론 음악 선생님, 때론 과학 선생님으로 등장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지도해주셨다. 처음엔 그게 굉장히 신기했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나 같은 경우, 과목에 따라 선생님의 이미지들이 마구 바뀌었기 때문에 엄마가 매해 다른 과목을 맡는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내가 아는 엄마의 이미지는 이것 하나인데, 그 어린 친구들 눈엔 때론 과학 선생님으로, 때론 음악 선생님으로 보일 것이라는 사실이 굉장히 오묘했다.


 엄마는 아이들을 좋아해서 선생님이 된 건 아니고 그 시절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여성에게 있어서 제일 좋은 직업이기도 하고, 또 연금이 나온다는 사실에 별 이유 없이 교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선생님이 된 건 아니라는 말씀과 달리, 당신께서는 반의 아이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얼굴에 웃음꽃을 가득 피우시곤 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때론 과학, 때론 음악, 다른 과목 선생님들로 번쩍번쩍 등장해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침 일찍 출근하던 모습.


 어렸을 때 나는 엄마가 정성스레 해준 집밥이 참 먹고 싶었다. 물론, 엄마는 그 바쁜 와중에도 머리에 그루프들을 만 채 대충 흰쌀밥에 조미김이라도 말아 “이거라도 먹고 가!”하며 내 입에 욱여 넣곤 하셨는데, 사춘기의 나는 그게 맛있으면서도 맛이 없었다. 매일 같이 등장하는 메뉴는 김치찌개,된장찌개. 혹은 다양한 종류의 김치 세 가지와 나물들. 사춘기 때 나는 그게 뭐라고 참 싫었다. “우리 시골쥐야? 고기 좀 줘.”라고 하면서. 시골쥐라는 말에 엄마아빠는 깔깔 웃곤 하셨다. 외숙모는 갈비찜도 해주고 불고기도 해주고 맛있는 것 많이들 해주시던데 엄마도 그러면 안 되냐고 괜히 반찬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그땐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없어서, 나 혼자 편의점에서 대충 삼각김밥이나 빵을 사서 빠르게 저녁을 챙긴 뒤 학원에 갔었다. 어렸을 때 철 없던 윤세희는 그런 엄마가 조금 미웠다. 그 중에서도 아주 선연히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다.


 그 영어 학원은 내가 자란 대치동 학원가에서도 꽤 크고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니 대략 2013년 즈음이었는데, 그 학원은 자신들은 종이 교재를 쓰지 않고 신세대 타블렛 교재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말로 엄마를 꼬시는데 성공했다. 집에서 꽤 거리가 멀어 영어 학원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었는데, 수업 시간이 5시에서 8시였기에 중간에 저녁 시간도 30분 정도 줬던 것이 기억이 난다. 처음 영어학원 버스를 타던 날, 엄마가 저녁을 사줄테니 퇴근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버스를 빈 손으로 타야만 했다. 대충 학원 앞에 편의점 한 군데 정도는 있겠지 하며 버스에 탔는데, 그 순간 엄마가 나타나 내 손을 붙들고 나타났었다.


 “샌드위치야!”


 엄마는 달려온 듯 헉헉대며 파리바게트 샌드위치를 내 손에 세게 쥐여주고는 버스에 타는 나를 보셨다. 자리에 앉아 창문 너머로 엄마를 봤다. 잘 갔다오라며 헉헉 대며 손을 흔드는 ‘선생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 난다. 애석하게도 고마워서가 아니라, 미워서 기억이 난다. 괜히 그땐 그냥 엄마가 미웠던 것 같다. 너무 바빠서 딸 저녁을 샌드위치로 대충 사주는 엄마가 미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땐 우리 엄마가 만약 그냥 전업 주부였다면, 이라는 상상을 많이 하곤 했다. 그랬다면 급하게 샌드위치를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나오기도 전에 불고기나 제육볶음 같은 것을 먹지 않았을까, 라는 나쁜 생각을 했다.

 

 그날 학원에 가서 엄마가 사준 파리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냥 눈물이 났었다. 괜히 이미 친해져서 서로 저녁 도시락을 나눠먹는 친구들에게도 질투가 났고, 나 혼자 구석에 앉아 파리바게트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 괜스레 처량하게 느껴져 엄마가 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은데 한편으론 이해되기도 한다. 그때 나는 질풍노도 시기의 무서운 중2였으니까.


 결국 그 학원은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것이 엄마의 샌드위치 때문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냥 엄마의 그런 모습들이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면서 원망스러웠던 이유 때문 아닐까 싶다. 괜한 반항심에 불쌍한 척이라도 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나 이거 먹고 학원 가야 돼?”라며 괜히 바쁜 엄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처음엔 충청도 시골, 그 다음엔 구로구에 살다 나의 교육을 위해 아빠와 열심히 노력해서 대치동까지 오신 자수성가 부모님인데, 그런 두 분의 고생을 짐작하기에 너무 어렸던 나이였던 걸까?


 요즘 엄마는 학교를 나가고 있지 않다. 병가를 내고 학교를 약 6개월 간 쉬기로 하셨다. 자세한 이유는 여쭤보지 못했다. 며칠 전 초등 교사에 대해 안 좋은 일들이 많아서, 혹시 엄마의 상처를 후벼파는 건 아닐까 싶어 물어보지 못했다. 엄마는 그냥 “어린 애들이랑 있는 게 이젠 힘들어서”라고 하셨다. 그래서 요즘 엄마는 이른 오전부터 내 아침을 위해 급하게 밥에 김을 말거나, 어제 해둔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 산책을 하고 계신다. 우리 집엔 3살 짜리 어린 강아지와 10살, 9살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 두 마리는 나와 여동생의 애정을 받는다고 하면 강아지는 단연 나이 드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엄마는 아빠의 출근길에 강아지와 함께 나가 산책을 하신다. 1시간 동네 한 바퀴를 빙 돌고, 돌아와 내가 깨어날 때 쯤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만드시고 내 등굣길을 기다리신다. 나를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주기 위해서다.


 처음 아빠는 왜 다 큰 딸들 학교까지 데려다 주냐며 반대하셨다. 9시, 대치동에서 방배역은 차가 많이 막혀서 한 번 데려다 주려면 족히 왕복 1시간 30분은 걸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빠는 딸바보가 아니고 와이프 바보다. 나와 여동생보단 엄마를 훨씬 더 좋아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네는 다 컸으면 지하철로 가면 되지, 왜 아침부터 엄마 고생시키냐고 뭐라고 하셨다.


 나는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엄마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조금 붙는 옷을 입고 싶은 날에 엄마가 바래다주면 왜 학교에 가는 데 그런 옷을 입고 가냐고 하실 엄마의 잔소리는 싫지만, 어릴 때를 생각하니 엄마와의 등굣길이 많이 낯설고 반가웠다. 내가 기억나는 아침의 엄마 모습은 그냥 바쁜 직장인이었으니까. 머리엔 그루프, 옷은 정장, 반 쯤 한 화장, 두 손으로는 밥을 떠는 모습 말이다. 그런 엄마가 학교 가는 나와 여동생을 바래다주겠다니,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엄마는 피곤할 텐데 이 아침에 왜 굳이 바래다주려고 하냐는 아빠와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셨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학교 가는 준비를 했는데, 두 분의 대화 중 엄마의 한 문장이 귀에 또렷이 들려 왔다.


 “애들 어렸을 때 못해줬으니까.”


 이제라도 해주고 싶다는 말이 들렸고, 아빠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도 엄마의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무뚝뚝한 성격의 나는 그런 엄마에게 괜찮다며 어리광 피울 수가 없었다. 결국 엄마는 그날부로 오전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를 바래다 주시기 시작했고, 그런 엄마는 꼭 무릎에 우리집 강아지 ‘마루’를 앉혀 두셨다.(사진도 마루.) 엄마 무릎에 앉아 창문 밖 풍경을 신나게 구경하는 마루와 그런 마루를 예뻐하며 운전하는 엄마, 조수석에 앉아 거울을 보는 나.



울집 막내 마루



 학교까지는 차로 40분 정도가 걸린다. 사실 지하철보다 차로 가는 것이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가 데려다주겠다고 할 때마다 암말 없이 조수석에 타고 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엄마와 함께하는 하루 시작이 좋아서일까? 어릴 때 느끼지 못한, 엄마와의 느긋한 아침 시간이 낯설면서도 신기해서일까? 엄마와의 등굣길엔 정말 다양한 풍경을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애들은 어떻니. 요즘 만나는 남자친구는 있니. 저번에 말했던 그 친구는 어떻니. 학교에 괜찮은 남자애 없니 등등. 요즘엔 엄마가 유튜브로 결혼 관련 영상을 보던데 그래서 그런지 25살인 나에게 뜬금없이 결혼정보회사 가입을 권유하기도 한다.

 




 학교까지 가는 40분, 나는 그때 비로소 어릴 때 엄마와 나누지 못했던 대화들을 맘껏 나눈다. 그럼 나는 반대로 어릴 때 엄마에게 묻지 못했던 것들을 묻는다. 요즘 아빠와의 사이는 어때. 엄마 무릎은 어때. 오늘 마루 산책은 어땠어. 오늘 날씨가 좋다 등등. 내가 아는 아침 시간의 엄마는 늘 정장 차림에 매우 바빠 보였는데, 요즘 엄마는 편안한 트레이닝복에 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계신다. 무릎에 앉은 마루가 달리는 차인데도 너무 편하게 자서인지, 나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당신에게도 힐링되는 시간이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엄마와 40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까지 가며 나는 새삼 어릴 때 기억을 많이 하곤 한다. 오늘, 더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내가 그 40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엄마와 대화했는지. 스쳐 지나가듯 이젠 엄마가 여유로워 보여서 나까지 굉장히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릴 때 왜 그렇게 바쁜 엄마의 모습을 싫어했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한창 사랑이 고픈 사춘기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


 25살, 지금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아직도 대화를 하다 보면 나는 절로 떼를 쓰고 말투도 늘어지는 등 어린아이가 된다. 신기하게도 어릴 땐 부끄러워서 괜히 하지 못했던 말들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내가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엄마와 함께하는 이 40분의 등교 시간 내게 영향이 꽤 컸음을 느꼈다.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엄마의 대학교 시절을 물어봤을 때였다. “엄마 때는 수강신청 어떻게 했어? 엄마도 장학금 받은 적 있어?” 조수석에 앉아 창밖의 구름을 보며 그렇게 물으면, 엄마는 무심하게 운전하며 그때의 기억들을 차차 말씀하셨다. 그러다 자연스레 아빠와의 연애 이야기도 나오고, 결혼 이야기도 나오고, 신혼 이야기도 나온다. 중2 시절 윤세희라면 절대 물어보지도 못했을 이야기를 지금 들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진작 물어볼 걸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엄마를 몰랐나 싶기도 하면서, 그렇게 바쁜 엄마를 미워했던 내가 웃기기도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2시간을 투자해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엄마가 참 고맙다. 그 덕에 난 고작 그 40 분동안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때의 엄마를, 아빠와 연애하던 25살의 엄마를 모두 듣게 되었으니까. “그때 아빠는 왜 그랬대? 젊을 때 아빤 좋은 남자는 아니었네.” “맞아, 맞아. 그걸로 그때 많이 싸웠지.” 이렇게, 같이 아빠 뒷담도 하기도 하고.


 아직은 엄마와 함께하는 등굣길이 조금은 낯설다. 늘 바쁘게 먼저 나가기만 했던 엄마가 이젠 나를 학교에 바래다준다니, 아직 조금 얼떨떨하다. 그런데 이제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이 40분 동안 어릴 때 엄마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도 하게 되었고, 진솔한 수다를 떨며 비로소 ‘엄마 앞의 딸’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엄마와 등교하면서 에전에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점점 더 하고 싶다. 중2 윤세희가 오글거려서 하지 못한 그런, ‘딸’ 같은 말들 말이다. 뭐 예를 들자면.



 그때, 나 중학교 2학년 때. 그 바쁜 와중에 김 말아서 준 밥 사실 진짜 맛있었다고. 영어 학원 가기 전 뛰어와서 소중히 쥐어준 파리바게트 샌드위치 참 고마웠다고. 엄마와 함께 웃고 떠드는 이 40분이 내 모든 하루 중 제일 소중하다고.



 학교 가는 길 40분. 나는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의 젊었던 시절을 듣고, 엄마를 미워했던 중2 윤세희가 되어 비로소 그때 하고팠던 말을 잔뜩 하고 있다. 20년 뒤의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 할 40분의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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