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소녀는 아린 아픔을 겪었다

소녀는 차였다

by 파이어



햇발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린다. 그 너머에 춤추듯 뉘엿거리며 잠자리가 나무 저편으로 날아간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내지만 땀은 그치지 않는다. 태양이 이토록 뜨거울 때가 또 있었을까 생각하며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까만 선글라스에 하얀 햇빛 차단 마스크를 한 나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하얀 팔 토시를 끼었다. 긴 레깅스 차림의 나는 한 손에 양산을, 다른 손에는 손수건을 들고 땀을 닦느라 분주하다. 양산 너머의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은 만화 속 장면처럼 뜨거운 태양과 축축한 공기와는 다르게 선명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날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명동 성당 앞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는 이름 모를 가수가 있었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소녀의 얼굴은 덩달아 발그레해졌다. 소녀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조심스럽게 훔쳐보고 있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그들은 오늘 처음 이곳에서 단 둘이 만났다. 소녀에게는 특별한 날이었고 며칠 전부터 오늘을 위해 준비를 했었다.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등등. 소녀는 소년에게 관심이 많았고 좋아하기까지 했으니 무척 달뜬 시간들을 보내다 드디어 오늘 명동성당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다. 소년의 남자다움과 약간 그을린 듯한 건강함이 좋았다. 그 친구는 소녀와는 다르게 외향적이었으며 자신감이 넘쳐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알게 모르게 교회 여자아이들이 그를 남다르게 바라본다는 이야기도 아름아름 들렸다. 소녀 또한 그를 특별하게 여기며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소년은 이곳에서 따로 만나자고 했다. 오늘 소녀는 이른 아침 언니가 나가고 몰래 찜 해놓은 언니의 하늘색 원피스를 훔쳐 입고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다. 유난히 뜨거운 햇빛이 붉은색 벽돌과 나무들, 성모 마리아상들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 친구로 지내면 좋겠어. “


“…….”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 까닭 모를 눈물 만이 아른거리네……”


버스킹 노랫말이 소녀의 가슴을 울리었다. 소녀는 보기 좋게 차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노래가 소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별나게 태양빛이 빛났고 마음은 타들어간 그날. 비라도 내렸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 거추장스럽기만 한 긴 치맛자락을 소녀는 거푸 매만졌다. 소녀의 뜨거운 얼굴과 마음이 붉어졌다.


길가의 늘어진 나무들이 모습은 오래전 그날 소녀의 마음 같았다. 힘이 쭉 빠진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간절하게 비라도 시원하게 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너희도 힘들지?” 자전거를 힘차게 구르는 사내아이의 뺨이 붉게 익었지만 발놀림만은 야무지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온 세상을 적시었다. 빗물이 나뭇잎을 세차게 두드리자 나무들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 생기가 도는지 두 팔을 벌려 하늘을 바라본다. “너희도 좋지?”


나 또한 개운한 빗줄기와 흙내음에 코끝이 상쾌하다. 굵은 빗소리가 시원하여 젖어든다. 뜨거웠던 아스팔트 위에 물보라가 낮게 깔렸다. 더운 열기가 한 풀 꺾이는 듯 촉촉해지는 이 순간을 나는 천천히 걸으며 빗소리에 귀 기울인다. 투둑투둑 툭 툭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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