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속 '그'

폭설의 3월 어느 날

by 파이어

20대, 어른이 된다는 설렘에 두근거렸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떨렸다. 늘 지갑 속 한편을 차지하며 있게 될 그것을 위해 잘 찍는다는 사진관을 찾아갔다.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말에 직원분이 사진관 안쪽에 거울이 있는 방을 안내했다. “여기서 머리 손질하시고 화장도 하고 밖으로 나오세요.” “……” 화장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딱히 손질할 것이 없었지만 안내받은 곳에서 잠시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밖으로 나갔다. 사진사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찍을 거라며 웃어보라고 하셨다. 어색한 미소에

“어색하게 말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자, 자 이 사진 평생 가는 사진인데…. 저쪽을 보고.”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며 계속 미소를 지으라고 주문을 하셨다. 주민등록증 사진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자연스럽게 살짝 웃는 20대 초반의 젊은 내가. 지금은 그 주민등록증이 플라스틱 사각형으로 조용하게 지갑 속에 있다. 시간이 멈춘 듯 항상 같은 모습의 ‘나‘를 보여준다.

나를 증명하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주민등록증이 필요했다. 소위 말하는 유흥업소 출입을 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삼십 대가 가까이 되었을 때까지도 신분증 검사를 받았던 나로서는 지갑 속 필수품이었다. 이십 대 후반 데이트로 맥주를 마시러 들어간 바에서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 명동 일대를 하염없이 걷다가 편의점에서 맥주캔을 사서 근처 공원 벤치에서 마셨던 적도 있었다. 그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나로서는 미안하기도 하여 멋쩍은 웃음과 함께 시원한 맥주 한 모금으로 채웠다. 필요했던 그 순간 민증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불이익을 다 겪어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중요한 신분증이기에 집에 고이 모셔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요한 순간은 이렇게 찾아온다.

시간이 흘러 흘러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미 주민등록증은 스마트폰에서 그 기능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다 폭발하는 건 아닌가 싶어 핸드폰 상점을 찾아갔다. 오래 사용하여 배터리가 힘을 못 쓰는 것 같다고 했다. 8년 사용한 핸드폰과 이별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핸드폰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하고 구입 서류에 서명을 하는데 신분증을 요구했다. 신분증은 지갑에 없었다. 요즘은 동전 지갑 정도의 작은 지갑으로 체크카드와 약간의 현금 정도만 들고 다닌 지 오래라 신분증이 지갑에 없었다. “안 가져왔는데, 어쩌죠?" "있어야 하는데 빨리 다녀오시겠어요?“ "……. 네" 신분증을 가져와야 한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더운 여름날 집에 가서 신분증을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상점으로 갔다. 필요한 순간이 있음에도 늘 지갑에 없는 신분증을 생각하며 더위 때문인지 신분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연신 땀을 흘리며 핸드폰을 바꿨다.

집에 돌아오며 주민등록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의 이십 대 초반의 모습이 박제된 듯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한글과 한자로 쓰인 내 이름 석 자, 일련번호(주민등록번호)와 집 주소. 처음 보는 것인 양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타인과 구별지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때때로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 온다. 나를 확인하는 열려라 참깨의 주문 대신 필수 열쇠,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이런 일상적인 순간들이 안전하고 매끄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가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존재를 가끔 잊는다. 만약 신분증이 없다면 평범했던 하루는 온통 장애물로 가득한 위로가 될 것이다.

처음 ‘그’를 만났던 설렘은 이제 희미해졌다. 지금은 ’그’로 인해 ‘안정감’이라는 또 다른 의미로 나를 보여준다. ‘그‘는 어딘가에 내 자리가 있음을 알게 해주고 내 자리를 잊지 않게 한다. 나와 함께 하는 신분증은 나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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