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3월 어느 날
발이 푹푹 빠진다. 3월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왔다. 그것도 무지하게 많이. 화이트데이에. 날이 날인지라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바쁘다고 한다. 치! 낭만적인 사랑고백도 하얀 눈의 사랑스러움도……. 이런저런 꿀꿀한 생각에 날씨까지 속을 끓게 했다. 오면서 들으니 지하철 2호선은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했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
나 또한 퇴근이 늦었다. 야근할 생각으로 저녁을 간단히 먹고 일을 하고 있는데 팀장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집에 못 갈 수 있으니 빨리 퇴근을 서두르라고 했다.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울 수 있다고도 말하며 우리를 재촉했다. 나는 서둘러 나와 전철을 탔다. 전철에서 내려 집에 가는 마을 버스를 타러 갔다. 마을 버스 정류장에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눈이 많이 온 관계로 오랫동안 버스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줄에서 이탈해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다. 나는 줄 끝에 서서 초조하게 마을 버스를 기다렸다. 발이 얼어 동동 거리며 차가 오는 방향을 계속 기웃거리기를 한참만에 버스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천천히 버스를 탔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내가 타는 버스를 모두 타기라도 하는 양 버스 안은 미어터질 듯 빈틈이 없었다. 나는 겨우 숨만 쉴 정도였다. 집까지 빨리 가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질 수 밖에. 느릿느릿 가던 버스는 중간에 멈춰 버렸다. 집에 가려면 세 정거장은 가야하는데 눈이 많이 와 더이상 운행이 힘들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에 모두들 내리며 날씨를 탓하고 걷기 시작했다. 별수없이 나도 내려 걸었다. 쌓인 눈에 발이 쑤욱쑤욱 빠졌다. 차도에는 서있는 차들이 제법 있었다. 뉴스에 나올 장면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무겁게 발을 내딛였다.
우리 아파트는 산 중턱에 있었다. 경사진 길에는 이미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길가 나무 위에는 눈이 쌓여 가지가 바닥에 닿을 듯 쳐져 있어 힘겨워 보였다. 그런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으니 왠지 무서웠다. 아파트 뒤로 보이는 산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장관이었다. 밤이었음에도 하얀색이 반사되어 빛났다. 바람은 세차게 불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어 등꼴이 오싹했다. 이럴때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눈이 너무 많이 왔기 때문이리라. 버스에서 내려 한참만에 단지 앞까지 왔는데 지금부터 저 경사진 길을 가야한다. 어려운 마지막 코스다.
길가로 천천히 조심조심 걸었다. 사람들이 지나 다녔으니 조금은 나으리라. 그러나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발을 딛고 알았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바닥이 반들반들해 졌고 눈이 덮여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바닥은 미끄러웠다. 아슬아슬 중심을 잡으며 집중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길가 옆에 벽을 짚으며 겨우겨우 살살. 눈은 계속 내렸으며 바람은 무섭게 산 속 나무들을 흔들어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서움에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오르니 종아리까지 아파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다 보니 손에서 땀이 나고 몸이 더워졌다.
잠시 동안 쉴 요량으로 벽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그만! 미끄덩 하며 발이 밀려 온 몸이 바닥을 향해 엎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몸의 절반이 눈 속에 파묻혔다. 민망함에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바닥이 미끄러워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벽을 짚고 일어났다. 땀이 주루룩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내가 엎어진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는 모양이 우스꽝스럽게 도드라져 보였다. 미끌거리는 바닥이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맨들맨들하여 일어나기도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놀았던 것일까. 어릴 때 겨울이 생각났다. 눈이 오면 비닐을 구해다 아이들이랑 썰매를 타며 놀았다. 그러면 지나가던 아저씨, 아줌마들은 어김없이 잔소리를 했다. “너희들이 길을 맨질맨질하게 닦아놓으니 걸어 다니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하며 호통을 치셨었다. 그리고 어른들이 연탄을 가져다 길에 던져 부셔 놓았다. 썰매를 타던 우리는 툴툴대며 다른 자리를 찾아야했다. 다른 언덕을 찾아 산자락을 헤매기도 했었다. 지금 연탄재가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생각을 하니 우습기도 하고 철이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고, 내 허리” 하며 나도 모르게 허리를 잡고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천천히 더욱 조심하여 옮겼다.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내가 그때 그 어른들 나이가 되어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 도착하고 나니 땀이 나서 더웠다. 마치 등산을 하고 온 양, 고지에 도착한 듯 올라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내가 걸어온 자리는 이미 눈이 쌓여 보이지 않았다. 지나온 길이 무색하게 보이지 않으니 왠지 씁쓸했다. 애써서 온 길인데 흔적도 없다니. 옷에 묻은 눈을 털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뒷산에서는 여전히 귀신 우는 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