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는 낭만이 그리운 날

by 파이어

며칠째 비가 쏟아진다. 온 집안이 축축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며 물을 쏟아내고 있다. 온 세상이 까맣다. 이제는 비가 ‘내린다’ 보다 비가 ‘쏟아진다‘가 더 잘 어울린다. 이런 날 외출은 많이 힘들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히며 툭툭툭 두드려댔다. 우산을 쓴 게 무색하도록 빗줄기는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신발이 젖고 옷이 젖고 내가 젖는다.

국민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다 층계참에 앉아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우리는 함께 학교 현관으로 나왔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차게 비가 퍼붓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거침없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빗물이 땅에 닿자마자 튀어 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침에 우산을 챙기지 못해 우리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일기예보는 늘 거짓말이다. 비 온다는 예고도 없었고 하늘도 맑았었다. 그러나 지금 하굣길에 비가 쏟아지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생은 오지 않을 엄마를 찾는 듯 교문 쪽을 살핀다. 헛일이다. 엄마는 지금쯤 열심히 일하고 계실 테니 말이다.


“엄마 안 왔어, 올 리가 없쟎아 어서 가자! 실내화를 책가방에 넣어. 실내화 안 젖게”


나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실내화를 책가방에 쑤셔 넣었다. 동생도 나를 따라 실내화를 가방에 넣고 빈 신발주머니로 머리위에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교문을 향해 뛰었다.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저기 초록색 현관문 보이지? 거기까지 뛰는 거야, 알았지?”


나는 손가락으로 길가에 있는 두 번째 집을 가리켰다. 그리고 동생을 바라봤다. 이미 동생 머리는 물에 젖어 곱슬머리가 더욱 꼬불거렸다. 그런 동생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자 가자.”


우리는 앞치락 뒤치락 거리며 비탈길을 뛰어 내려갔다. 비가 신발주머니를, 내 손을, 어깨를, 바지를 때리고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신발에 물이 들어오고 양말은 이미 젖어버렸다. 길가에 세차게 흐르는 빗물들은 하천이라도 만들 기세로 아래로 아래로 굵은 줄기를 이루며 흘렀다. 우리보다 빠르게.


우리 국민학교는 산 위에 있었다. 경사진 산길 위에 뒷산을 병풍 삼아 우뚝 서 있었다. 통학 길 옆으로는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 계곡처럼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풀벌레들과 잡초들이 무성한 곳이었다. 물 흐르는 소리에 맞춰 나와 동생의 뜀박질 소리가 어우러졌다. 우리는 길가의 초록색 현관문 앞에서 잠시 쉬었다. 이미 우리 옷은 홀딱 젖어있었다.


“힘들어, 비는 왜 오는 거야! 우산도 없는데.”


귀여운 입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뛰지 말고 빠르게 걸어가자, 어차피 젖었으니까.”


동생을 달래며 두 손을 맞잡고 우리는 산비탈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아스팔트 양옆에 빗물들이 넘실넘실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우리는 넘실대는 빗물 앞에 두 발로 막아서며 까르르 웃었다.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처럼 세찬 물줄기를 가로막고 우뚝 섰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빗물은 발을 때리고 다리를 훑으며 바지를 덮쳐 속옷까지 젖게 했다. 내려오며 그 일을 반복하니 즐거웠다. 신발주머니는 한 손에 쥔 채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흔들었고 다른 손은 서로 맞잡고 있었다. 우리는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비를 맞고 흠뻑 젖었지만 집으로 길은 마냥 즐거웠다. 속옷까지 흠뻑 젖도록 뛰어보고 놀아보는 것도 즐겁기만 했다.



아이를 낳고 나는 비가 오면 비옷을 입히고 우산 없이 밖으로 나가곤 했다. 아이들은 노란색 비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파란색, 빨간색 장화를 신고 첨벙첨벙. 모자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까르르 웃는다. 잠방잠방 웅덩이에 빗물이 튀어 오르며 장단을 맞추고 좋아라 발장구를 세게도 느리게도 치며 즐거워한다.


“엄마, 나 우산 접어두고 비 맞고 놀다 가면 안 돼요?“

“영어학원은? 바로 가야 하지 않아?“

“죄송한데 오늘만 빼주시면 안 돼요?“

“……. 알았어, 너무 오래 놀지는 마, 감기 걸려, 그리고 우산 꼭 챙겨오고.”


아이들은 비가 오면 가끔 우산을 접고 빗속을 뛰어다니며 논다. 집에 돌아오면 흠뻑 젖은 생쥐 모양으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 되어 들어와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우산으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를 막고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빗물을 보며 재미있었다고 흥분했다. 옷이 흠뻑 젖고 신발이 젖지만 그 질퍽한 느낌이 즐거웠다고 했다. 온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보니 행복하면서도 한편 부러움과 진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이럴 때는 나이 듦이 서글퍼진다. 나이가 들고 그 나이에 걸맞은(?) 행동들에 나를 가두게 된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생기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편견은 썩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기쁨과 행복의 기준이 바뀌고 작은 순간의 즐거움을 잊어간다. 알면서도 서글프고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서럽다. 곱슬머리 동생과 함께 빗속에서 뛰어다니며 하늘을 향해 깔깔대던 그날을 떠올린다. 다시 한번 첨벙첨벙 발장구를 치고 흠뻑 젖고 싶다. 그날의 비를 만끽할 수 있던 나의 자유로웠던 영혼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그림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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