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 군의 2020년 금호아트홀 연주를 듣고
https://youtu.be/AMo-XoSkPxc?si=DUhw_GREexnXhc0h
내가 본 임윤찬 군의 첫 연주는 4년 전인 2020년 금호아트홀에서 바흐의 3성 인벤션(또는 신포니아) 15곡을 연주한 공연이었다. 실황을 본 것은 아니었고 위의 영상을 본 것이다. 이 연주에 대해서 내가 깊은 인상을 가졌던 것은, 곡을 출판된 순서대로 1번부터 15번까지 연주하지 않고 스스로 연주 순서를 조정하였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흥미로운 게 아니라 나는 굴드가 이와 비슷한 순서로 인벤션 음반을 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임윤찬 군이 연주한 순서는 아래와 같다. 위는 번호고 아래는 각 곡의 조성을 나열한 것이다.
1 - 2 - 5 - 14 - 11 - 10 - 15 - 7 - 6 - 12 - 13 - 3 - 4 - 8 - 9
C - c - Eb - Bb - g - G - b - e - E - A - a - D - d - F - f
그리고 굴드의 음반에서 연주된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 2- 5 - 14 - 11 - 10 - 15 - 7 - 6 - 13 - 12 - 3 - 4 - 8 - 9
C - c - Eb - Bb - g - G - b - e - E - a - A - D - d - F - f
차이가 보이는가? 단 두 곡, 12번과 13번의 순서가 바뀌고 나머지는 모두 같다. 누군가는 이 순서들이 대부분 같다는 것에 눈길이 갈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저 두 곡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점이 흥미를 유발했다.
음악 이론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이 순서가 단순히 무작위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조성 간에는 여러 가지 관계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나란한조[평행조, Paralleltonart] - 조표가 동일한 조성들로, 음계의 모든 음이 같지만 주음이 다르다. 한쪽은 장조고, 한쪽은 단조다.
i. e. 다장조(C) - 가단조(a): 조표 없음, 라장조(D) - 나단조(b): 샾(#) 두 개, 내림가장조(Ab) - 바단조(f): 플랫(b) 네 개
2. 같은으뜸음조 [동주음조, Varianttonart] - 으뜸음을 공유하는 조성들으로, 음계가 장음계와 단음계로 구분되기에 마찬가지로 한쪽은 장조고, 한쪽은 단조다.
i. e. 다장조(C) - 다단조(c), 라장조(D) - 라단조(d)
3. 딸림조[Dominanttonart] - 어떤 조성의 으뜸음의 5도 위, 또는 4도 아래인 딸림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조성으로, 장/단조 한 쌍씩 관계된다.
i. e. 다장조(C) - 사장조(G) / 사단조(g), 라장조(D) - 가장조(A) / 가단조(a), 바단조(f) - 다장조(C) / 다단조(c)
이를 확장하여 음악학자 후고 리만(Hugo Riemann)은 조성 간의 관계를 공유하는 음을 기준으로 3도권, 5도권 관계를 환원하여 체계화하였고, 이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 토네츠[Tonnetz]이다. 리만 이론과 토네츠를 이용하여 저 위의 조성의 나열을 설명하면 아주 간단하게 끝나지만, 여기서 이 이론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니 위의 세 관계들을 통해 최대한 설명해 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15곡을 나열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첫 곡은 1번인 다장조로 시작할 것. - 일종의 초기 조건이 되겠다.
2. 인접한 곡의 조성 간의 관계는 나란한조, 같은으뜸음조, 딸림조 중 하나로 하되, 같은으뜸음조를 최우선적으로 인접시킬 것.
그리고 이 두 조건들로만 나열해 보면 분명히 해결되지 않는 링크가 하나는 생기게 되는데, 실제로 굴드의 선택에서도 나단조(b)는 유일하게 나란한조, 같은으뜸음조, 딸림조 관계가 아닌 사장조(G)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두 조성은 같은 3도권 관계이긴 하지만 나란한조와 반대 방향으로 3도 차이나는 조성이다. 이를 Gegenklang 내지는 Gegenparallelklang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반(反)평행조” 정도 되겠다. 이해하지 못해도 무방한 내용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일까? 이 문제는 저 위의 토네츠에서 선을 따라 일종의 한붓그리기를 하는 문제나 다름없다. 그리고 조금만 해보다 보면 두 가지의 방향만으로 처음의 C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현재 나열된 9개의 음들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9개의 음이라고 한 것은 같은으뜸음조인 C - c, D - d, E - e, F - f, G - g, A - a를 하나로 묶을 수 있어 6개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위의 2번 조건에서 같은으뜸음조를 우선적으로 인접시켰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럼 왜 두 가지 방향만으로 연결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토네츠에서 가로선 오른쪽 방향에 근친조가 놓이고 나란한조는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 형태의 사선 위에 놓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한 번은 “\“ 형태의 사선을 지나야 처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또한 수학의 그래프 이론을 통해 증명할 수 있겠지만, 본 글의 서술 범위를 아득히 초월하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제 이 15개 조성 간에 가능한 관계, 즉 다음 곡의 조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조성들을 한 번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C - c (동주음 고정)
c - Eb(평행), G, g(딸림)
D - d(동주음), b(평행), A, a(딸림)
d - D(동주음), F(평행), Bb(반평행), A, a(딸림)
Eb - c(평행), g(반평행), Bb(딸림)
E - e(동주음), b(딸림)
e - E(동주음), G(평행), C(반평행), b(딸림)
F - f(동주음), d(평행), a(반평행), C(딸림)
f - F(동주음), C(딸림)
G - g(동주음), e(평행), b(반평행), D, d(딸림)
g - G(동주음), Bb(평행), Eb(반평행), D, d(딸림)
A - a(동주음), E, e(딸림)
a - A(동주음), C(평행), F(반평행), E, e(딸림)
Bb - g(평행), d(반평행), F, f(딸림)
b - D(평행), G(반평행)
이 관계들을 조합하여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을 때 가능한 순서가 단 두 가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아래의 순서다:
C - c - Eb - Bb - g - G - e - E - b - D - d - A - a - F - f
C - c - Eb - g - G - b - D - d - Bb - f - F - a - A - E - e
참고로 아래의 순서는 반평행 관계가 두 개이기 때문에 (F - a, e - C) 위의 관계보다는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많은 경우의 수들 중에 이 두 가지만, 그것도 더 적합한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말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굴드나 임윤찬 군의 순서와는 사뭇 다른데,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은 버금딸림조 관계까지, 즉 딸림조와 반대 방향으로 5도 차이나는 조성 관계까지 활용하여 배치했기 때문이다.
버금딸림조는 이론적으로는 약점이 있는데, 정격진행이기 때문에 조성 간 텐션이 감소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물론 실제로 들을 때는 그 효과가 미미할 수 있지만, 마지막 코드와 첫 코드 사이에 발생하는 도미넌트 - 토닉 관계가 강한 종지감을 만들어 내어 곡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새로 곡이 시작하는 느낌을 반감시킬 수 있다는 점은 불가피한 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굴드가 처음 이 순서를 만들 때 위의 순서가 가능한 지 몰랐거나, 아니라면 딸림조든 버금딸림조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거나, 또는 버금딸림조 관계까지 포함한 관계들 중 음악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순서를 본인 판단하에 결정했거나, 실제 전말은 당연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만약 버금딸림조 관계까지 가능하도록 만든다면 너무나도 많은 경우의 수가 가능해진다. 이들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해서 결정했다고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생각건대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은, 마지막 곡을 9번 바단조로 고정해 두고 순서를 배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다른 곡들과는 현저히 다른 밀도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곡이며 길이도 가장 길다. 굴드 또한 평균율 1집의 24번 나단조 곡처럼 대미를 장식하기에 아주 적합한 곡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물론 이렇게 고정하더라도 경우의 수는 수십 가지가 넘지만 말이다.
연주자들에게 이 정도의 이론적 엄밀성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 실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위의 순서대로 연주했더라면 그것이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할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제 다시 임윤찬 군의 순서를 보자. 흥미로운 것은 임윤찬 군의 이 순서가 굴드의 것에 상당수 의존하고 있음에도, 12번과 13번, 즉 가장조와 가단조의 곡의 순서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굴드의 순서를 다시 가져와서, 서로 교환 가능한 조성들을 괄호로 묶으면 아래와 같다.
C - c - Eb - Bb - g - G - b - (e - E) - (a - A) - D - d - F - f
이 마장조/마단조와 가장조/가단조는 앞뒤의 조성들과 버금딸림조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장/단조가 서로 교환 가능하다. 나머지 조성들은 평행조 또는 반평행조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에 변동이 불가능하다.
즉 말하자면 임윤찬 군은 서로 교환 가능한 두 쌍 중 한 쌍을 선택하여 바꾸어서 연주했다는 말이 된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 될 것이다. 단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것이 연주 흐름 상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연습 결과 연주의 용이를 위해서 바꾸었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가능성은 많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러한 시도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굴드라는 거장이 남긴 창의적 유산을 능동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신에게 맞게 적용했다는 점이다. 만일 굴드의 순서에서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연주했더라면 ‘아, 굴드의 앨범을 들어본 적이 있어서 따라 해 보았구나’라며 그저 흥미로운 시도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해석적인 측면에서는 또 굴드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쉬프의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는데, 템포부터 레지에로 논 레가토의 터치 등 전체적인 뉘앙스도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15번 나단조를 연주할 때 중간 휴지부에서 악보에 없는 임프로비지옹(improvision)을 연주했는데 그것이 쉬프의 85년도 데카 앨범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https://youtu.be/AMo-XoSkPxc?si=DUhw_GREexnXhc0h&t=609 (10:09부터)
https://youtu.be/54kxknwN0zk?si=fiov8IQ6MDa9amHA&t=59 (0:59부터)
이런 정도의 모방은 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카덴차의 경우도 요즘은 굳이 작곡가 본인의 것이 아니더라도 이전 시대에 거장들에 의해 연주된 것들을 그대로 연주하지 않는가? 애초에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도 하고, 해당 임프로비지옹 자체도 곡의 흐름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 외에도 쳄발로 연주자들이 하듯이 펼침화음으로 마지막 화음을 마무리하는 등의 여러 시도들을 보면서 다른 연주자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많이 찾아 듣고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강한 연주자라고 생각했었다. 일전에 본 인터뷰에서도 이그나츠 프리드먼, 알프레드 코르토 등을 언급하며 옛 거장들의 연주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자체는 젊은 연주자에게 좋은 배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괜히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비록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난 월요일 부천아트센터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 나서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이 글은 본래 독립된 글로 작성될 예정이었는데, 해당 공연 후기의 긴 서론의 느낌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본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공연에 대한 본격적인 후기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