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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Feb 24. 2024

달리기 DNA

소소한 에세이 과제 '운동회'

  예전의 운동회는 그야말로 동네잔치 분위기였다.

  가을 운동회를 위해 학년별로 단체 마스게임 한 개와 청백 단체 경기 두어 개를 준비하고 연습하느라 여름부터 땡볕 아래 맹연습을 하곤 했었다. 지금 들으면 아동학대로 신고당할지도 모르는 강행군에 빈혈이 있는 친구들은 픽픽 쓰러지기도 했는데, 이미 월요일 아침 조회 때도 본 적 있는 장면이었기에 우리들은 놀라기는커녕 양호실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놀리기까지 했다. 법적 수업 시수 확보와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에 차질이 크고 교육적 의의가 적다는 분위기, 단체 마스 게임은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 등으로 운동회는 점점 축소되었고, 요즘은 외부 업체를 불러 전문 사회자가 몇 가지 게임을 진행하고 끝내는 것이 대세이다. 업체에 비용을 지불한 대신에 피나는 연습도 지루한 훈련도 없이 간단하게 하루 만에 끝이 나는 것이다. 그때는 운동장 곳곳에 돗자리를 깔고 부모님에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까지 오셔서 응원을 했었는데 요즘은 코로나 이후로 외부인의 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아 학생당 가족의 인원수를 제한하기도 하니 예전에 비하면 응원석이 썰렁하기 그지없다. 오전 마지막 경기는 무조건 저학년의 콩주머니 던지기! 명중률 낮은 콩주머니에 몇 차례 맞고도 전혀 터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모두가 초조해진다. 결국 선생님들이 손으로 마감 테이프 부위를 찢어줘 가며 겨우 터뜨려진 박 안에서는 종이를 오려 만든 꽃가루와 함께 ‘즐거운 점심시간’ ‘맛있게 드세요’ 등 식사시간을 알리는 문구가 두루마리 종이에 적혀 내려왔었다.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부모님들의 참여가 많이 줄었고, 급식도 시작되었기 때문에 ‘옛날 운동회’ 분위기는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다. 도시락을 싸서 응원 올 엄마는 그때 마음대로 휴가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엄마 자리를 대신 채워준 건 옆 단지에 사는 큰 이모셨다. 요리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맛있는 도시락을 층층이 싸 온 이모는 1학년이었던 내가 꼭두각시 춤을 추는 모습과 개인 달리기 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엄마 몫까지 응원해 주셨다. 열렬히 응원 하고 계신 줄만 알았지 한편으로는 예리한 눈으로 나의 달리기 실력을 평가하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운동회가 끝나고 며칠 뒤 주말, 이모네와 함께 외식도 하고 이모네 집에서 사촌들과 놀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대화는 대강 다음과 같다.


  이모 : 야~ 니는 느그 딸래미 뛰는 거 봤나? 뛰는 폼이 꼭 홍서방하고 똑같더라.

  엄마 : 왜? 어떤데?

  이모 : 홍서방처럼 다리만 앞서가고 상체는 뒤로 빠져가지고... 트랙 안쪽으로 팍팍 치고 들어가서 앞질러야 되는데 멀~찍이 돌아서 뛰어가더라고. 그러니 꼴찌 하지.


  아.. 어쩐지! 나는 조별 개인 달리기에서 맨날 꼴등으로 들어왔었는데 그게 아빠를 닮은 거였다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있는데 엄마가 질문을 던졌다.

  “달리기 할 때는 뱅 돌아가지 말고 열심히 치고 들어가야지 왜 크게 돌아갔노?”

  “아... 나는 거기에서 막 친구들이 몰려서 부딪히는 게 싫어서...”    

 엄마는 이 와중에도 ‘우리 딸은 저 나이에도 저렇게 속이 깊어서, 경쟁에서 이기기보다는 친구들을 배려한다’며 좋게 해석하셨다. 그래서 사실은 넘어지는 것도 싫고, 무릎 까지는 것도 싫고, 흙먼지바람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더더욱 싫다는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이모가 묘사한 내 모습은, 대대로 계주 선수를 배출했던 최 씨 집안의 달리기 폼과는 사뭇 달랐기에 나는 운동 신경 면에서는 철저히 친탁을 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를 많이 닮은 딸아이의 첫 운동회가 지난봄에 있었다. 반 대표 계주선수에 선발되지 않았다기에 “저런~ 아쉽겠네” 하고 마음 읽어주기를 시도했는데 “아니, 난 달리기에 별로 그렇게 흥미가 있지 않아서 괜찮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도 나도 계주선수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우리 딸은 외탁이든 친탁이든 달리기 DNA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데 아쉽지조차 않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긍정회로 DNA만은 확실히 물려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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