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교실 - 첫 습작 (에세이에 가까운)
아빠의 사고 소식을 접한 건 올해 초.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엄마와 둘이 지리산 종주를 하시고, 칠순 기념으로 스위스 여행도 다녀오신 강철 체력의 사나이가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 마침 본가에 내려가 있던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빠의 구급차 탑승 소식을 전해왔다. 무심한 엄마 혼자 있었으면 일이 다 수습되고서야 전화했을 게 뻔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죄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언니라도 거기 있어서 다행이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중환자실에서 며칠 지내고 일반병동으로 옮겼다고, 찢어진 머리는 몇 바늘 꿰매었고 내출혈은 심각하지 않다고 덤덤하게 전하는 엄마.
“이번 주말에 내가 한 번 내려갈까요?”
“그래, 가족이니까 면회나 한 번 하고 가라.”
평소대로였다면, 바쁜데 뭣하러...라는 말로 딸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거절했을 텐데 이번엔 흔쾌히 승낙이 떨어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주렁주렁 챙겨 내려갈 때에는 짐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지만 모처럼 홑몸으로 떠나는 고향 방문이 가볍다. 무거운 마음만 잠시 내려놓으면 짧은 일정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 아이들 놀잇감 대신 가벼운 소설책 두어 권과 갈아입을 속옷 한 벌로 짐도 단출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빠가 내 얼굴도 못 알아보면? 말과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어눌하다면? 치료가 길어진다면? 당장 직장에 휴직원을 내고 엄마 곁에 내려오는 건 가능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몇 년 뒤의 상황까지 가정하며 이어진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에 가슴을 몰래 쓸어내린다. 손주들 편지를 전달하고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혼자 남겨진 휴게실에서 잠깐 참았던 눈물을 훔친다. 효도가 별 게 아닌데. 그저 가까이 살고 따수운 밥이나 자주 먹는 게 효도인데... 스무 살 상경 이후 고향 방문은 점점 뜸해졌고, 아이를 둘 낳고 나서는 계절에 한 번 방문하는 것도 겨우 지켜질까 말까이다. 휴게실로 돌아온 엄마와 병원 밖으로 나와 돼지국밥을 먹으며 아빠의 치료 경과를 듣는다. 엄마와 단 둘이 식사하는 것도, 둘이서만 하룻밤 잠을 함께 자는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를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여서 늘 소란스럽던 본가가 오늘은 적막에 휩싸였다. 엄마가 미리 보일러로 데워놓고 이불까지 세팅해 놓던 서재방은 온기가 없이 냉랭하다. 엄마와 침대에 누워 한 두 마디 나누다 깜박 잠이 들었다 생각했는데 눈뜨니 아침이다. 코 고는 아빠랑 자느라 늘 밤잠을 설쳤다는 엄마는 모처럼 뒤척임 한 번 없이 꿀잠을 잤단다. 그 코 고는 아빠마저 중환자실에 가 있는 며칠은 또 얼마나 심란한 마음이었겠느냐고, 이 큰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니 잠이 잘 왔겠느냐고 보태려다 만다.
남편도 사위도 손주들도 없는 아침 식탁은 가볍다. 물이나 한 잔 하고 아침에 병원 들렀다가 근처에서 커피랑 빵 사 먹자는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가볍다.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아 시원하지도 않은 물을 한 컵 들이켜고, 병원에서 아빠를 한 번 더 만났다. 내려올 때의 무거운 마음은 덜어내고, 엄마의 아침상 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은 나는 금세 일상을 되찾았다.
몇 달 뒤, 설날을 맞아 모처럼 네 식구가 시끌벅적 본가에 내려갔다. 아빠는 그사이 컨디션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약 복용을 위해 금주까지 하신 덕에 얼굴과 머릿결에서 윤기가 난다. 친구들도 다 그 소리라며, 회춘의 비결이 뭐냐고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아빠. 다만 예전처럼 등산을 하러 가지는 않게 되었고, 몇 주 푹 잘 쉬었다고 여기기로 했단다.
무심코 물을 따르려다 보니 뒷 베란다에 2L들이 삼다수가 쌓여있다. 까드득- 새 생수를 뜯는 소리가 야속하리만치 경쾌하다. 아빠는 등산만 더 이상 못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breadwinner. (명사) 집안의 생계비를 버는 사람, 가장
중학교 때 영어학원에서 이 단어를 처음 배운 날,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 브래드위너가 뭔 줄 아세요? 빵을 가져오는 사람. 가장이래요! 근데 아빠는 약수터에서 물을 떠 오는 사람이니까 waterwinner 잖아요. 우리 집 워러위너~.”
“그래? 워러위너 좋네! 워러위너~ 아임 어 워러위너.”
정수기도 없고 생수 배달도 안 해 먹던 우리 가족의 주된 식수는 아빠가 어디선가 길어오는 약수였다. 장소는 황령산 중턱이기도 했고, 이사 온 뒤로는 이기대 산책로 옆 어느 숲 속의 약수터이기도 했다. 정확한 장소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각종 검사에서 먹을 수 있는 물로 판정된 약수. 어마어마하게 커서 아빠 말고는 아무도 들지 못하는 무거운 생수통이었다가 점차 용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는 한평생 워러위너로써의 역할에 충실했다. 작년에는 엄마의 칠순 기념으로 통영에서 온 가족이 만나 여행을 했는데, 아빠의 차 트렁크에는 N번째 사용 중인 각종 생수통에 담아 온 ‘워러위너’의 약숫물이 들어있었다. 큰 딸네 작은 딸네 각 숙소에 두 통씩 배부된 식수를 보며, 마트에 가면 몇천 원이면 사는 걸 무겁게 왜 싸들고 왔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딸 둘이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한 지는 한참 되었고, 엄마도 삼십 년 이상 근속한 공무원이었기에 아빠가 실질적으로 온전히 나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던 적은 언제까지였을까 새삼스레 기억을 더듬어 본다. 결혼해서 나의 가정을 이루고 난 뒤에도 나는 늘 아빠가 내 원가정의 가장이라고 여겨왔던 것은 어쩌면 아빠가 길어오는 물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칠순이 훌쩍 넘고 손주를 셋이나 보고도 아빠의 양쪽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가장의 무게가 곧 아빠에게는 새벽에 길어오는 약숫물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그만 그 무게를 내려놓고 뒤늦게나마 가벼운 여생을 즐기기로 결심한 아빠의 변화가 반갑다.
삐삐삐삡 삐삐삡
언제나처럼 어두운 새벽을 깨우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현관에 들어서는 아빠. 이제 아빠의 양손엔 무거운 약수통 대신 편의점에서 산 따끈한 조간신문 한 부와 돋보기안경이 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