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지령 Oct 27. 2023

1층 거실창가에 서면

우리 집에서 아름다운 곳

아파트 1층에 산다. 처음 1층 분양을 받으면서 지인들에게 “1층은 집안이 들여다보여 사생활이 노출된다, 벌레가 많다, 겨울에 춥다” 등등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1층에 대한 오해들. 어디서 흘러 들어온 일까. 분양당시 로얄층은 모두 분양이 완료된 상태였고, 남아있는 건 저층뿐. 남편과 나는 2, 3층을 분양받을 바에는 아이가 뛸 수라도 있게 1층을 분양받자고 이야기했다. 살아보니 1층은 풍경을 조망하는 넓은 시야는 줄 수 없지만 시가 쓰고 싶어지는 눈을 갖게 했다.

 

우리 집 창으로 보이는 화단에는 벚꽃나무가 있다. 겨울에는 마른 몸을 드러낸 듯 가지만 앙상한 게 ‘언제 싹이 트나’ 싶었는데, 봄에 연두 같기도 하고, 노랑 같기도 한 새초롬한  싹을 틔었다. 하나, 둘 빼꼼 얼굴을 비치던 싹이 팝콘 터지듯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만개하였다. 벚꽃이 질 때는 바람에 실려 살랑살랑 흩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눈으로 보는 “시” 같았다. 은유로 가득 찬 흩날림. 누군가 뿌리는 색종이 조각 같기도, 새의 깃털조각 같기도, 따뜻한 날 내리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벚꽃이 지는 모습이 모두에게 전하는 축복 같아서 덜 화내고, 더 다정하게 행복하자고 생각하는 나날이었다. 천천히 계절이 흘렀다. 잎은 선명한 초록으로 변했고, 그 초록잎 한 귀퉁이에 어느새 가을이 물들었다. 살며시 찾아온 가을을 바라보며, 가을을 마중했다.

 

거실창 바로 앞 화단에 내 허리춤만 한 낮은 나무에는 노오란 꽃이 핀다. 노란색에 하얀 물감을 한방울 떨어뜨린 느낌. 샛노랗지 않으니 노란색이 아닌 노오란색 이라고 해야 될 것만 같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야생화지만 잎이 4장으로 붙어있는 꽃잎모양이 꼭 노랑나비를 닮았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느라 한바탕 소용돌이가 지나간 집. 아이가 등교 후 집에는 고요가 찾아온다. 평화로운 적막. 아이가 아침 먹은 설거지는 잠시 미뤄두고, 이 평화를 위해 커피를 내린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 나는 잠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풍경. 낮에는 밖이 환하니 밖에서는 집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안 보이고, 나는 그들을 볼 수 있는 미묘한 시선이 즐겁다. 엄마와 손잡고 걷는 아이의 모습. 부부가 손잡고 걷는 모습, 강아지를 산책시키며 강아지를 기다려주는 모습. 모두가 자신의 삶에, 일상에 다정한 몸짓들.

<안치환>이라는 가수가 노래했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사람의 풍경이 자연의 풍경보다 더 따스하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먹고 난 아침 설거지를 끝낸 후 환기시키려고 창가에 가보니, 단지 내 어린이집 아이들이 산책을 나왔다. 선생님 뒤를 따라 짝지와 손잡고,줄지어 걷는 모습이 꼭 병아리 같아 귀엽다. 맞잡은 작디작은 고사리 손. 한 아이가 우리 집 앞 화단에 핀 꽃에 앉은 나비를 보느라 짝지 손을 잡지 않고, 한참을 서서 있으니 그 짝지가 손잡으라고 친구의 손을 가져다 잡는다. 귀여워 웃음이 새었다. 저리 작은 손도, 맞잡으면 서로를 지켜줄 수 있구나. 무심코 지나치던 눈길을 붙잡아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요즘에 나에게는 “밴드 아줌마”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이가 학원 끝나고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놀 때 거실창가로 와서 공을 달라기도 하고, 학원 가방을  나에게 넘기기도 한다. 아이의 친구들도 그 모습을 많이 봐서 우리 집 위치를 다 알고 있어서인지, 가끔 아이 친구들도 창문을 두드리며 “보름이 있어요? 보름이 지금 놀 수 있어요?” 하며, 아이를 찾을 때가 있다. 그렇다 보니 놀다가 친구들이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면, 아이는 친구들을 우리 집 창가로 데려왔고, 나는 창문을 열고, 밴드를 붙여주곤 했다. 어느 날도 그랬다. 보름이 친구가 머뭇대면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으로 우리 집 거실 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마침 살짝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서, “종훈아, 무슨 일 있니?” 하고 부르킥보드 타다가 넘어졌다며 밴드를 붙여달라고 한다. 보니 심하게 까지지 않아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놀던 대여섯 명 정도의 보름이 친구들이 모여들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안녕, 가은아~ 안녕, 수민아~ 보름이네 집에 나중에 놀러 와~"  "보름이는 어디 갔어요?"  "보름이는 축구교실 갔어."

거실창가로 모인 아이들은 ‘나는 보름이네 가봤네, 나는 못 가봤네’ 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재잘 됨이 귀엽다. 보름이 친구들의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다들 흔쾌히 허락해 준다. 축구 다녀온 보름이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면서.(너희 내일 학교에서 보는 거 아니었니?ㅋㅋ.) 그 후로 나는 밴드를 쟁이러 가끔 약국에 들른다.

 

1층 살면서 ‘아… 사람에게는 창이 필요하구나.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고 싶구나’를 느낀다. 생각해 보면 벽만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는 답답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사람은 모두가 어쩌면 마음에 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듯이, 벽으로만 이루어진 마음은 병든다. 사람은 모두 보고, 보여줘야 하는 소통의 창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창을 통해 꼭 누구와 만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이는 풍경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하고, 흐르는 시간 속에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창을 통해 느낀다. 나는 창으로 그림을 바꿔 걸듯 철마다 바뀌는 계절을, 사람이 사는 풍경을, 우리 집 화단 앞까지 날아오는 나비를, 그리고 아이 친구들과 만난다. 창문을 열면, 아침을 여는 새소리에 활력을 얻고, 청소차 소리, 사람들의 발걸음 같은 부지런한 소리에 최선을 다하는 저마다의 삶에 존경심과 감사함을 느낀다.

오늘도 어제처럼,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선다. 해가 낮게 뜨는 가을아침, 집 안 깊숙이 햇살이 들어왔다. 햇살이 따스해서 가을 창가는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1층에 살면서 체득하며 살아간다.


* 이 글은 팟캐스트 <팟빵>에서 윤슬지령이 읽어주는 글로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 엄마의 그림책

2023년, 8월에 발행된 신간이에요. 해마다 여름이면 할머니집에 7일 동안 머무는 아이. 낮잠 잘 시간에  바람을 쐬려고 덧창을 열었더니....

"와, 세상에!"아이는 감탄을 하며 놀랐는데요. 어떤 일들이 일어났길래 아이는 감탄을 했을까요?

이 그림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가 창문을 열어, 보는 풍경들이 우리가 아는 명화그림이 펼쳐지는 형식이에요. '앙리루소'부터 '클로드모네',' 빈센트 반 고흐'까지 명화그림들을 오마주 했지요. 명화를 찾아보며 읽는 재미가 있는 그림책인데요. 창문을 열 때마다 큰비가 쏟아질  것 같은 냄새도 나구요, 종소리도 들려요, 축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창문은 닫으면 단절이고, 열면 소통이기도 하고, 세상과 연결이기도 하잖아요.  창을 열어 소통하고 보고 느끼며 그렇게  아이들도 어른이 됩니다.

"창"이 주는 이미지를 참 잘 활용하고 거기에다 명화를 얹은 스토리까지 정말 멋진 그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과 어떤 그림이 좋았는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에 명화출처도 수록되어 있으니 실제 명화그림을 찾아보는 재미도 놓치지 마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누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