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TV를 즐겨 본다. 집에 오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TV 속으로 빠져든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며 휴식을 취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남편은 특히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재미있는 대사는 기억했다가 대화에 자주 사용한다.
한 번은 밤늦게 간식을 먹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조금 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대꾸한다.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에 나온 두 여배우의 욕설 영상이 퍼지면서 화제가 된 말이다.
“마음에 안 들어. 당신 배 좀 봐. 이렇게 먹다간 진짜 큰일 난다고!”
남편은 지금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고 있다. 오랜 세월 끊어내지 못하던 담배를 끊은 지 100일이 지났다. 본인은 끊은 게 아니라 잠시 쉬고 있는 거로 말한다. 그럼 앞으로 쭉 쉬라며 나도 장단을 맞춰준다. 잘한다고 엉덩이도 토닥토닥해준다. 문제는 금단현상으로 입이 심심해서 밤늦게 자꾸 뭔가를 먹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살이 찌고 내 잔소리는 늘어난다. 잔소리가 길어진다 싶으면 남편이 살짝궁 한마디 던진다.
“사랑해요.”
드라마 <도깨비>에서 배우 한고은이 한 대사 “사랑해요”를 개그우먼 이수지가 패러디한 영상이 한때 인기였다. 그게 재미있다며 따라 한다. 한참 잔소리를 하다가 이수지의 깜찍한 표정이며 말투를 흉내 내는 그 한마디에 웃음이 터진다.
남편의 애교 아닌 애교에 최근에 읽은 그림책이 생각난다. 오나리 유코가 쓴 <행복한 질문>이다. 식사 시간에 아내가 질문을 하고 남편은 성실하게 답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만약 눈을 떴을 때 내가 아주 작은 벌레가 되어서 당신 코 위에 살며시 앉아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한 번 날아봐, 그러겠지. 그리고 비용이 반으로 줄 테니까 함께 여행을 가면 되겠다! 당신한테 꼭 맞는 귀여운 침대도 만들어 줄래. 참, 당신이 찌부러져 다치면 안 되니까 살며시 아주 살며시 입 맞추는 연습도 해 둬야겠다.”
아내는 엉뚱한 질문을 계속 던진다. 내가 곰이 된다면? 내가 나무가 된다면? 어떤 질문을 해도 남편은 당황하지 않고 아내에게 다정한 답을 건넨다.
내 남편의 행동에 왜 이 책이 생각났을까. 남편은 사랑한다, 예쁘다, 잘한다, 같은 기분 좋은 말을 아끼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부딪혀 서로 불편한 상황에서도 유머로 분위기를 풀어간다. 이런 면이 그림책 속 남편의 다정함을 떠올리게 한 것 같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이수지의“사랑해요”를 남발해서 약효가 떨어지긴 하지만 싫지는 않다. 상대의 마음 온도를 느낄 수 있는 말 한마디의 진동은 크다. 무더위로 불쾌 지수가 오르는 요즘, 남편이 건네는 말 한마디로 짜증을 희석하고 웃음의 탄산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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