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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0. 2024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매끈하고 마음은 들뜬 어느 날, 석파정 미술관이 나에게 퍼르퍼르 손짓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게 안부를 전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렇게 나는 그들이 전하는 안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한국 미술사에 내로라하는 거장들의 작품과 편지가 말을 걸었다. 김정희의 추사체 작품으로 시작해서 신사임당의 초충도, 김환기, 김창열, 서세옥, 정상화, 유영국, 이우환, 장욱진, 천경자, 이중섭 등 열 명이 넘는 작가들이 전하는 내면의 인사는 내 걸음을 더 나릿나릿하게 만들며 작품 앞에 묶어두었다. 그 중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바로 이대원 화가의 <사과나무>다.  

  

이대원 <사과나무>

 

이대원은 큰 농원을 가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에 유화 <백일홍>을 그려 눈길을 끌었고 열일곱 살에 조선 미술전에 입상하며 일찌감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 뜻에 따라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법학부 재학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이 극에 달했고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히로시마로 갔던 그는 다행히 해방 후 무사 귀국했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이후 또 한차례 6·25전쟁을 무사히 겪어냈지만, 마음에 자리한 절대적인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방황했다. 우울함이 극에 달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구한 건 아내의 한 마디였다.   

   

“다시 그림을 그리세요.”     


그는 다시 붓을 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둘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다섯 딸, 부친이 살던 집, 꽃 같은 것들을. 그는 부친이 남긴 넓은 농원을 일구면서 농원에 고스란히 담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농원에는 경성제대 입학을 축하하며 부친이 심은 사과나무가 있었다. 수십 년 세월에 구부러진 그 사과나무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에게 사과나무는 행복한 어린 시절로 통하는 문이 아니었을까.    


  

이대원은 탐스러운 사과가 열린 과수원 풍경을 5m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담아냈다. 전시된 <사과나무> 앞에 서면, 마치 과수원에 들어와 탐스럽게 열린 사과나무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밝고 강렬한 색감에서 풍기는 풍성함과 따뜻함, 그가 경험한 어린 추억의 행복감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그의 그림이 고스란히 말해준다. 불행했던 시절은 음 소거되고 온통 황홀경에 빠져 인생을 즐기는 그의 모습만 재생된다. 나는 그가 소담하게 피운 화양연화를 <사과나무>에서 선연하게 맛본다. ‘그 시절, 그는 분명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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