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kitsch 하게 보내는 방법
사람들이 어찌나 바쁘던지 연말을 같이 보내고 싶으면 10월부터 부산스럽게 약속을 잡아야 했다. 올해 마라톤을 같이 준비한 친구들과의 송년회도 미리 잡아놓은 일정 중 하나였다. 그들과는 다양한 취미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부서를 옮기고 나서도 친하게 지내고 있던 터였다.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물론 좋지만, 소소한 이벤트가 있으면 더 즐겁지 않냐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해봤다. 그렇다고 딱히 아이디어가 있었던 건 아니라 롤링 페이퍼는 어떠냐고 가볍게 던져봤는데 적을 말이 없다고 바로 거절당했다. 쓸데없는 선물 해주기도 떠올랐지만, 방구석의 처박힐 선물의 마지막이 그려져 농담으로만 한 번 꺼내보기만 했다.
선물 교환을 하면 좋겠다고 의견은 모아졌지만, 주제를 정하지 않으면 너무 진지해지기 마련이라 고민하던 찰나에 예인이 동영상 하나를 보냈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설거지할 사람을 고르는 게임을 진행한다. 방법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무지개 색 순서에 맞춰 준비해 온 과자를 차례대로 꺼낸다. 만약 두 명 이상이 동일한 과자를 가져왔다면 그 사람들이 벌칙을 수행하게 된다. 규칙에 맞게 게임을 진행하면서 서로의 과자를 구경한다. 노란색까지는 순조롭게 게임이 흘러가다가 초록색일 때 킬링 포인트가 등장한다. 과자를 꺼낼 타이밍에 일행 중 한 명이 미니 수박을 꺼내고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보라색이 될 때까지 전부 다 다른 과자를 가져와 이 게임으로는 결판을 내지 못한다. 결국 설거지 내기는 사다리 타기로 정했다는 자막과 함께 동영상은 끝이 난다.
쇼츠를 보고 나서 눈에는 생기가 돌고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두리안을 가져와서 노란색이나 초록색 때 꺼내놓으면 되지 않을까. 무지개색 콘셉트를 다른 애들도 좋아하는 눈치라 기존 룰을 수정하기로 했다. 각자 한 색깔씩 맡은 후 다음 색깔을 담당한 사람에게 본인이 가져온 과자를 선물로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A는 주황색, B는 초록색, C는 파란색, D는 보라색을 맡았다면 A는 B에게, B는 C에게, C는 D에게, D는 A에게 과자를 주면 된다. 색깔은 미리 제비 뽑기로 가격은 만 원 이내로.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술집에서 준비해 온 메모지를 곱게 접어 제비 뽑기 할 준비를 하고 저마다 뽑은 색을 확인했다. 깜짝 선물이 재미를 더해주기 때문에 송년회까지 어떤 색을 뽑았는지는 비밀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뽑기 결과와 다른 색의 과자를 사 올 수도 있으므로 제비를 보관해서 증거로 남겨두기로 했다. 선물을 주고받지만 신뢰도가 그리 높은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뽑은 색이 빨간색임을 알자마자 무얼 사갈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표정의 변화를 눈치챈 애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한 마디씩 했다. 먹을 수 있는 걸 사 와라. 너만 먹을 수 있는 거면 안 된다. 선물에 장난치지 말아라 등등.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어떤지 알 기회였다. 자꾸만 불신하는 친구들에게 걱정을 사실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괴이한 선물을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식상한 선물도 싫었다. 사람들이 모두 다 나만큼 센스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3주 남은 송년회가 기다려졌다.
송년회 당일 날 예인이 컨디션이 안 좋아 송년회에 못 온다는 연락이 왔다. 아픈 와중에 선물은 야무지게 챙겨 온 그녀 덕에 회사에서라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먼저 가져온 과자의 색을 공개했는데 나 (빨강), 예인 (남), 승관 (초록), 도겸 (보라)이었다. 나 → 승관 → 예인 → 도겸 → 나. 순서를 고려했을 때 나는 도겸의 선물을 받는다. 도대체 그가 뭘 사 왔을지 심히 걱정되었다.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닦달하니 안심시키며 선물을 고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 오고 싶었던 게 있었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 무난한 걸 사 왔다고 했다. 원래 사려던 건 무엇이었는지 묻자 보라색 카레라고 답했다. 일본에서 파는 카레 제품으로 식욕이 팍팍 떨어지는 색의 괴이한 음식이었다. 받았어도 먹지 못했을 테니 안 받는 게 다행이었다.
승관이 예인에게, 예인이 도겸한테 선물을 주고 나머지 선물 교환은 저녁 식사 장소에서 하기로 했다. 대놓고 부산스럽게 행동하면 부서원들에게 원치 않는 관심을 받을 수 있어서 과자 전달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예인은 몰래 도겸의 의자 밑에 승관은 탕비실 냉장고에 선물을 놓기로 했다. 도겸이 자연스럽게 바닥에 있던 봉투를 줍고 그 안을 확인해 보니 오레오 웨하스초코가 들어있었다. 맛이 없을 수가 없는 환상의 과자. 예인은 성공적인 선물 배달을 하고 본인의 선물을 수거해서 유유히 퇴근했다. 감사 인사 겸 확인차 본인이 가져온 선물을 찍어서 카톡방에 올렸다. 최근에 다녀온 일본 여행에서 사 왔는지 일본어가 적혀있는 과자였다. 초록 숲 배경에 다람쥐들이 과자를 들고 있는 패키지가 제법 귀여웠다. 승관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파란색을 뽑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예인의 카톡이 도착한 지 몇 분 후 승관은 놀랄만한 답장을 보냈다. 본인은 초록색 자가비 과자를 준비했으며 그 과자는 본인이 산 과자가 아니라고 했다. 졸지에 절도범이 된 예인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독촉했다. 냉장고에 과자가 저것밖에 없어서 당연히 승관의 선물인 줄 알았다는 그녀는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매우 아프지만 도둑이 된 예인에게 승관은 다시 한번 경악할 말을 했다. 여태까지 농담이었고 그 과자가 본인이 산 선물이 맞는다는 진실 고백을 했다. 어쩐지 냉장고에 일본 과자가 시기적절하게 들어있을 리가 없었다. 깜빡 속아버린 예인과 나는 열을 받아 한바탕 욕을 하고 자리에 가서 꿀밤을 때리고 싶었다. 유튜버도 아니면서 깜짝 카메라를 준비한 이때의 승관은 내 선물이 뭔지 상상도 못 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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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익혀서 나온 곱창이 돌판 위에서 유혹하고 있었지만 선물 교환식이 먼저였다. 근심을 한시라도 빨리 털어버릴 수 있게 도겸의 선물을 먼저 받았다. 부피가 제법 있어 보이는 과자를 건네받고 보니 인간 사료 중 하나인 자색 고구마 칩이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게 아니냐고 추궁했지만 그는 인터넷에서 샀다며 부정했다. 괜찮은 거라고 하더니 너무 투박한걸. 생각보다 수수한 선물을 의자에 걸어두고 준비해 온 선물을 승관에게 건넸다. 포장부터 신경 쓰고 싶어서 아쿠아 디 파르마 쇼핑백에 선물을 담아왔다. 포장지에 중국어가 적혀있어서 그런지 빤히 쳐다만 보고 있길래 마라탕 소스라고 알려주었다. 선물의 정체를 밝혔는데도 요란법석이 아니었다. 내 회심의 일격은 실패했다. 그래도 승관은 고마워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양심 없이 재료도 달라고 했다. 그 말이 안 들리는 척 무시하고 노릇하게 구워진 곱창을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참으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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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전에 선물로 받은 성인 상체만 한 자색 고구마 칩을 들여다보았다. 돈 주고 사 먹을 일 없는 과자라니. 한 입 먹었는데 맛이 자극적이지 않다. 이런 걸 누가 먹나. 진짜 별로 하면서 벌써 삼십 분째 끊임없이 먹고 있다. 고구마 칩 내 마음의 별★로. 상당히 무서운 걸 선물로 받아 버렸다. 이 기세면 앉은자리에서 다 먹을 것 같아 과자 입구를 얼른 봉했다. 과자 한 봉지만으로도 연말이 풍성해졌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초년생이라고 하기에도 나이를 먹었지만 역시 유치하게 노는 게 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