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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Aug 03. 2023

정당화된 르상티망, 샤덴프로이데


유명인들에 대한 대중적인 공분은 형식상 그들이 저지른 죄과를 향해 있으나, 실제로는 '인민 재판'에 의해 공인된 죄인들의 인격을 공격하고 굴복 시키는 자체에 목적이 있다. 때문에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또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얼마만큼의 부정적인 영향을 남기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는 실제 잘못이라 할 만한 게 없더라도 그렇다. (기실 무엇이 잘못이라는 판별 자체가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이랄 게 없는 민중 정서에 비추어 이루어진다.) 애초에 사회 정의라는 대의와는 무관한 유흥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유명인의 실언, 실책, 범죄 이력과 같은 명분은 다만 다수의 익명성을 방패삼아 특정인을 린치하는 비열함에 대한 면책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어떤 식으로든 비난받아 마땅한, 명백한 악인이라 해도 그를 대하는 대중들의 태도가 비열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럴 때에도 사람들은 그가 저지른 죄과에 대한 응분의 처벌(이것을 -법관도 아닌 사람들이-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하나의 계기로 하여 자기의 가학적인 충동, 울분을 '배설'하는 데에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소위 '논란'을 만들고 몰두하는 사람들치고, 정작 문제가 되는 사태를 해결하거나 근본적인 개선책을 강구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대개 '논란'의 내용은 다수 대중들의 일상과 직접적으로 맞닿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주장의 계기로만 삼을 뿐이다. 기실 사람들은 '논란'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론에 의해 공인된 죄인과 (적어도 공공에 드러날만한 죄를 짓지 않은) 자신을 최대한 극적으로 대조하면서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음에 즐거움을 느낀다. 따라서 '논란'이 심화될 수록, 논란의 초점은 그 계기가 된 사건 자체보다는, 그러한 과오를 초래하는 데에 기여했을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을 지적하고 성토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수많은 재야 관상가들과 도덕 재판관들의 정돈되지 않은 심급을 거쳐, 논란의 당사자는 도무지 교정의 여지가 없는 지독한 악의를 지닌 '인간 쓰레기'로 공인된다. 그리고 논란의 계기가 된 사건은 단지 그의 본질적인 악의의 표상, 직접적인 표현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축된다. 사태의 전후 맥락이 소거되고 모든 문제가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단순화된다. 문제화된 문제적 개인 이외에, 문제라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하여 개인에 대한 비난 자체가 정당화되고 하나의 현안으로서 사태화 된다. 머지 않아 '논란'은 문제시된 개인의 치부를 얼마나 극적으로 드러내고 조롱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스포츠와 같은 것으로 귀결한다. 그렇게 여론의 표적이 된 개인은 몰락하지만, 실제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 논란의 당사자가 상대방과 공공에 사죄를 구하고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 되었어도, 사람들은 오히려 죄인의 자백을 구실삼아 더욱 열성적으로 논란에 몰두한다. 이 경우에, 당사자의 공적인 사죄는 자기에 대한 여론의 무자비한 징벌을 승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최종 심급으로서의 선언과 같은 것으로 기능한다. 사죄의 타이밍이 늦거나 빠른 것과는 상관없이, 이는 폭주하는 여론에 대한 자기의 인격적 방어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사죄는 빠르면 빠를 수록, 그리고 일체의 변명없이 낮은 자세를 취할 수록 좋다는 게 (대개 그럴 일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권장되는 '통설'이지만, 실제로 불특정 다수에게 사죄를 구하는 건 그리 현명한 처세가 아니다. 이는 호화 변호인단을 거느린 유수의 기업가, 또는 대중 심리의 유용을 업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쉽게 사과를 입에 담지 않고 법적인 분쟁에서 자주 '공개되지 않은 조건으로의 합의'를 취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공공에 사죄를 구해야 할 만큼 여론에 의해 적대시된 개인은 이미 어떤 경우에도 개심의 여지가 없는 악인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특히 생계의 목적으로) 여론의 도덕적 승인을 재차 구해야 할 처지라는 점에서 사죄의 진의를 의심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곤란에 처한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무엇이든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다고 추측하지 않기는 어렵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사과를 받아들인 최선의 경우에도 어차피 다른 한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걸 납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란의 당사자가 논란의 결과로 겪는 몰락이 극적일 수록, 그가 종전까지 누리고 있던 사회적 지위가 높을 수록, 널리 우수하다고 인정받았던 사람일 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만족감은 배가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여론의 판정을 통해 대조적으로 드러나는 도덕적 우열에 입각하여 자기를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실 대개의 논란은 논란으로 비화될만한 죄악을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외에 그러한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스스로를 선량하다 자부하는 민중의 열등감에서 비롯한다. 대다수 민중들은 남들보다 특별히 선량한 품성과 도덕 관념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저 악행을 범할 용기나 능력이 없어서 선인으로 머문다. 연애 시장에서 '사람은 착하다'는 평가가 사실상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전무하다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것처럼, 세상에는 착하지라도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마지 못해 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단적으로 말해, 얼마든지 주가 조작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젊고 매력적인 애인을 얼마든지 만들어 외도를 범할 수 있는데, 순수한 도덕적 원칙에 입각해서 안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애초에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선량한 채로 머무는 사람이 더 많다. 반면 '어떤' 악인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의 비행이 초래할지도 모를 파탄적 결과로 부터 보통 사람들보다 비교적 폭넓은 자유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문란한 이성 관계를 지속하고 손쉽게 많은 부를 거머쥔다.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 악인들의 악덕은 비-도덕, 반-도덕적이기를 선택할 수 있는 일탈에의 자유를 표상한다. 이런 카리스마적인 악인에 대해 다수 민중이 가질 수 있는 비교 우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무력함에 의한 선'뿐이다. 그리고 도덕적인 공분의 일환으로 치러지는 '논란'은 이를 지고의 미덕으로 추존할 수 있는 유일한 공론의 형식이다. 이를 통해 철저히 도덕률에 구속된, 무력한 민중은 자기가 선하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한없이 뛰어난 인간일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믿으며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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