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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Feb 29. 2024

자폐적 커뮤니케이션

다들 외로워서 인터넷을 한다. 현생에서의 이렇다 할 인간 관계가 없는 외톨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현실에서 교류할 '지인'이 있는 보통의 사회인들도 충분한 양의, 또는 원하는 양상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한다는 소외 의식의 발로에서 인터넷을 한다.


인터넷의 사회 관계망은 비록 현실과는 구분되는 가상의 토대에서 비대면의 간접적인 형식으로 구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현실의 인간 관계에 대해 일정한 비교 우위를 가진다. 같은 연고, 배경을 공유하는 개인들간의 우연적인 조우를 통해 구축되는 현실의 인간 관계에서는 자주 뜻하지 않게 성향에 맞지 않는 인간들과 어울려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반면, 인터넷에 접속한 다른 모든 타인을 시공간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열람할 수 있는 인터넷에서는 철저히 내 선택, 성향에 의한 인간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현실에서의 만남은 부득이하게 각자의 물리적 행동 반경 내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지만, 인터넷에서는 나와 유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이고 거주지나 직장 등 각자의 현실적인 생활 기반과는 별개로 구축된 관계이기에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기도 현실에서보다 훨씬 간편하다. 어차피 얼굴 보고 살 사이가 아니니 서로간에 예의 차릴 것 없이 그냥 연락을 끊어서 단교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차단, 블랙리스트 기능을 활용해 상대방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 또한 현실의 인간 관계가 끊임없는 듣고 말하기의 과정으로서, 서로의 말을 경청해줄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반면, 인터넷에서는 특정한 대화 상대가 없이도 공개된 게시판, 블로그 등지에 글을 써서 얼마든지 공적인 발언을 할 수 있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현실의 인간 관계의 완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은 자신과 이질적인 타자를 마주해, 그 '다름'을 공유하는 것에 본연의 의미가 있는데, 각자가 친교의 대상을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터넷에서는 상호의 동질성이 관계의 기준으로 자리잡기 쉽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는 모든 결정이 즉각적인 효과를 가진다. 각각의 체계적 기능이 특정한 입력 패턴에 직접 대응하여 발효되는 인터넷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최소한의 지연을 거쳐 실현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관계의 성립과 단절 역시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팔로우'를 하면 '아는 사람' 이상의 관계가 되고 '언팔로우'를 하면 이전과 다름없이 전혀 무관한 사람이 된다. '차단'을 하면 타인은 그 즉시, 일찍이 내 삶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인터넷에서는 이런 식으로 타인을 각자의 관계망 외부로 간편하게 추방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에서는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기 어렵다. 불편의 근원을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는 수단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것에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야 할 이유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곧 불편을 자아낼 여지가 있는 어떤 이질성, 차이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건 우리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기 위함이다.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나누고 각자가 지닌 불완전성을 의탁하기 위해, 또는 상호의 차이 자체를 취하고 즐기기 위해 우리는 타인과의 사교를 추구한다. 타인은 나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기에 다른 생각과 성향을 가지고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으며, 그 사실이 필연적으로 모종의 이물감을 자아내지만, 그 '다름'이 비로소 그가 자신의 고유한 구획과 내용을 가지는 타인일 수 있게 한다. 달리 말하면, 타인이 지닌 차이에 의해 우리는 타인이 나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타자성에 대한 실감을 얻는다. 우리가 거울 속의 스스로와 대화하는 대신에 타인과의 교류를 추구하는 건 그가 내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과의 교류에서는 서로간에 나눌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졌고, 같은 결함을 공유하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조차도 아니다. 자체의 고유한 차이를 가지지 않는 타인은 자신과의 안락한 일치감에 의해 신임 받는다는 점에서 자기 이미지의 투사물에 불과하다. 그는 나와 동일한 생각과 성향을 가지기에 나는 그와 갈등의 여지없이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같은 이유에서 그는 나 자신과 실천적인 차원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마치 나의 거울상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생각하며, 결정을 내리고 자극에 대한 반응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인과의 교류는 이질적인 외부의 침투를 미연에 차단하여 완결적인 자아상을 보존하려는 병적인 자기애의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관계로부터는 자기에 대한 동질성이 스스로에게 있어 더없이 적합하다는 자기 강화적 암시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 시작한 인터넷에서 더더욱 소통에의 갈망을 체감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그곳에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이루어진 것들이 되풀이 되고, 각자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동질성의 무의미한 교환이 성사될 따름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방인과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들리는 건 자신의 반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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