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일을 그린 것으로 성경에서는 루카 복음서를 통해 전해진다(2, 22-39).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정결례란 '사람과 짐승의 맏배(외아들을 포함한 맏이, 장자)'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모든 첫 수확(곡식, 열매)과 생명(사람, 짐승)을 하늘에 감사하며 되돌려드리는 행위이다. 아울러 몸을 푼 산모는 출산 때 피를 보았다는 이유로 정결치 못하다 여겨져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성전에서 정화의 예를 지냈다. 정결례를 올릴 때에는 성전에 5세겔을 바치는데 가난한 이들은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하였다.
요셉이 비둘기를 준비하였다. 실제로 요셉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뒤에 이어질 그림의 내용인 이집트 피난살이 때문일 수도 있다. 조토는 그림의 순서를 예수 탄생과 공현 다음에 이 그림을 배치했지만 성경의 기록으로 본다면 동방 박사와의 공현 이후에 바로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다가 헤로데가 죽은 후에야 갈릴레아로 돌아와 나자렛에 정착했다. 그러니 목숨이 위태로웠던 이집트 피난살이 중에 예루살렘에있는 사원을 찾지는 못했을 것이고 시간의 흐름상 피난에서 돌아온 직후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것이다. 미학상 요셉이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것보다 비둘기를 들고 있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비둘기가 성령을 상징하거나 생명 혹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혹시 지난 8화 연재에 소개된 그림에서 예수와 다른 인물들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성화에서는 거룩한 인물을 표현할 때 일반인과 달리 머리 뒤에 빛나는 후광(後光)을 두르는데 전통적으로 삼각형은 성부 하느님을, 원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 밖의 성인들에게 사용한다. 특별히 예수의 후광에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 표시를 원형 안에 그려 넣는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받아 안은 노인은 시메온이고 그 뒤에 있는 여인은 한나이다. 이들은 구약 시절부터 이어온 예언자들로 이들이 예수를 맞이하는 것은 예수의 정통성을 상징하며,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가 곧 예수임을 의미한다. 아기 예수가 모세의 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되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예수로 인하여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구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오랜 계획에 따른 것이며 구약과 신약이 한 흐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완성됨을 뜻한다.
메시아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시메온은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라고 찬미가를 부른 후,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예언자 한나는 아세르 지파 출신 프누엘의 딸로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겼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다음이 매우 중요하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라고 전하는 부분이다. 성경을 보면 군중들을 셀 때 여자와 아이는 제외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 표현을 하는 것처럼 당시 여성의 지위는 형편없었다. 남성의 소유물 혹은 재산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한 여인이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시메온의 찬미가와 연결된다. 시메온은 찬미가에서 "구원은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다."라며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한나가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막중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취약계층으로 사회적인 돌봄을 전혀 받지 못하던 고아, 과부, 노인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모든 것은 앞서 그리스도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은 것과 의미가 같다.
조토는 그녀가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나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4. Fuga in Egitto 이집트로의 피신
마태오 복음서(2, 1-15)에 따르면 동방 박사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헤로데가 등장한다. 그는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물었고, 기록된 예언을 토대로 유다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박사들로부터 별이 나타난 시간까지 알아낸 그는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당부했지만 동방 박사들은 꿈속에서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헤로데를 피해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요셉도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나타나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라고 전하였고 요셉은 즉시 일어나 그 밤에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향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렀다.
천사가 하늘에서 이집트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나귀 위의 마리아는 안정감 있는 이동을 위해 어깨에 아기띠를 단단히 매고 예수를 꼭 안았다.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가득한데 고개를 바짝 들고 두 눈은 정면을 똑바로 향하고 있다. 천사의 영보부터 예수의 탄생까지 모든 일들이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하늘의 뜻을 의연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던 그녀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 어미로서 앞으로 맞이할 일들에 당당히 마주하며 반드시 아기를 지켜내겠다는의지가담겼다.
가엾은 요셉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니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가! 늙고 지친 몸이지만 요셉은 앉아서 걱정만 하지 않았다. 피신하라는 천사의 말에 잠에서 깨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밤 중에 이집트로 향한 것으로 보아 그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요셉이 있었기에 마리아가 굳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5. Strage degli Innocenti 무고한 이들의 학살
마태오 복음서 (2,16-18)의 뒤 이은 이야기는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는 내용이다. 헤로데는 박사들이 자신의 당부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고장으로 몰래 돌아간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낸 별이 나타난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높은 곳에서 왕관을 쓰고 손가락질 하나로 이 끔찍한 학살을 지시한 헤로데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선명하다. 아래에는 헤로데의 명을 받은 이들이 아기들을 학살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고급 천으로 망토를 지어 입은 관료들과 머리에 투구를 쓴 군인들은 한 발짝 물러나 있고 칼을 쥐고 있는 건 누더기를 걸친 이들이다.
헤로데가 저지르는 이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는 관료와 군인들은 제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생계가 어려운 가난한 이들(혹은 노예나 죄수들)을 이용하여 그들이대신 손에 칼을 쥐고휘두르게 하였다. 살인을 직접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거부권이 없는 불쌍한 이들에게 살인을 교사한 치졸과 비겁의 죄가 더 얹어졌을 뿐이다.
아기를 빼앗긴 어미들의 절규와 몸부림이다. 이들의 눈에 흐르는 것은 아마도 피눈물이었을 것이다. 중세의 그림 중에서 조토이전에 절규와 눈물로 얼룩진 그림은 없었다. 학살자에게 다리를 붙잡힌 아기가 어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매달려 있고 무고한 아기들이 그렇게 죽었다.
* 이 연재는 매주 일요일 발행될 예정입니다.
* 연재 안에 수록되는 모든 이미지의 출처는 HALTADEFINIZIONE 임을 밝힙니다.
* 그림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작품의 배경이 가톨릭이기에 용어 및 인용되는 성경 말씀은 되도록 가톨릭 표기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