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생의 3달을 그곳에서 보냈고, 아빠, 나, 간병인 이렇게 3명이서 교대로 밤낮으로 간호했다.
엄마는 2인실을 사용했고, 그 병동에 입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으셨다. 병원에서는 상태가 비슷한 환자와 같이 병실을 배정해 줬고, 의식이 없는 환자들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옆 보호자와 함께 기도하며 아픔을 나눴다. 마지막 순간 보호자로서 어떤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힘을 내며 서로를 다독였다. 실낱같은 희망 속에 건강하게 퇴원하는 꿈도 꿨지만, 상태가 악화될 때는 함께 가슴 아파했다.
금요일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간호를 맡았고, 3달 동안 지방에서 올라가 주말을 병원에서 보냈다.
엄마의 병도 진전이 없고 점점 지쳐가던 어느 날, 큰 아이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할머니 병원 가지 마~ 할머니 미워~”
그때 큰아이 나이 9살.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하지만 철이 없다 싶어 순간 꾸짖었고, 이내 둘이 안고 펑펑 울며 아이를 달랬다.
“조금만 기다려. 곧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말은 ‘엄마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는다는 말이었고,
하루라도 엄마를 더 볼 수 있음에 감사한 날 들이었지만 아이는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으로
상처 입고 힘든 시간이었다.
의사는 엄마에게 오늘이 며칠이냐고 매일 물었다.
그럴 때마다 “2003년 5월?”이라며 아프기 전 다녀온 제주도 여행 날짜만 기억했다.
뇌 전이로 점점 떨어져 가는 기억이지만, 남동생의 공무원 합격은 무엇보다 또렷이 기억하고 기뻐했다.
우리는 신기해서 매일 물었고, 본인의 마지막 소임이라 생각하셨는지 그 소식을 듣고 이내 의식을 놓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