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dermovie Jan 05. 2023

이야기는 전설이다

3,000년의 기다림

3,000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2022)




*본 영화와 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던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 최후의 인물이 된 로버트 네빌을 주인공으로 한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흡혈귀가 된 괴물을 상대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네빌을 보면서 독자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인 네빌에 몰입해 공포에 떤다. 그러나 이 소설 속 흡혈귀들은 결국 적응에 성공해 ‘신인류’가 된다. 끝내 신인류에게 잡힌 네빌은 처형을 앞두게 되지만, 공개 처형 직전 신인류 여성 루스가 건넨 독약을 마시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죽음을 앞둔 그의 마지막 대사인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로 끝을 맺는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 자의식 가득한 뻔뻔한 이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을 <나는 전설이다>는 그렇게 강한 뒤통수를 치며 끝난다.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두눈박이가 비정상임을 깨달은 구인류는 그렇게 혼자서 쓸쓸히 죽어간다. 그리고 구세대인 자신이 신세대에게 비정상의 개념을 품은 신화이자, 전설이 됐음을 쓸쓸히 선언하며 사라져가는 것이다. 이렇게 네빌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구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로 신인류에게 기억되며 전설로 남을 것이다. 



<매드맥스>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조지 밀러의 신작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야기란 끝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끝난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의 기억으로 이야기는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며 전설이 될 것이라고 믿는 영화다. 이 영화는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이야기의 힘을 믿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은 서사학자다. 그녀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일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힘을 믿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의 초반부, 그녀는 튀르키예에 도착한 순간부터 믿을 수 없는 환영을 지속적으로 목격한다. 그리고 강연을 펼치는 순간에는 그 환영에 의해 기절까지 한다. 그 환영은 이야기를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려 했던 지나간 시절의 부산물쯤으로 여기는 그녀에게 호통을 치고 그녀를 쓰러트린다. 영화는 이렇게 초반부터 말 그대로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이는 그 힘에 의해 맥없이 쓰러진다. 


이후 우연한 계기 속 시장에서 기념품으로 병 하나를 구입한 그녀는 그 병을 닦다가 그 안에 잠들어있던 진(이드리스 엘바)을 깨운다. 그리고 예상 가능한 진의 대사. 그는 그녀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호텔에서 알리테아는 진이 병에 갇히게 된 3,000년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시바 여왕(아마이토 라굼)과 솔로몬 왕(니콜라스 무아와드)의 이야기, 굴텐(에세 유크셀)과 무스타파 왕자(마테오 보첼리)의 이야기, 무라드(오굴칸 아르만 우슬루)와 이브라힘(잭 브래디)의 이야기, 그리고 제피르(볼쿠 골게다르)의 이야기까지, 진이 겪었던, 그리고 병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알리테아가 겪는 아픔의 현실과 닮아있다. 영화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 시바 여왕이 침을 삼키는 장면은 알리테아 역시 진을 보고 침을 삼키는 것으로 재현된다. 비행기에서 책을 읽으며 다리를 떠나는 오프닝 시퀀스 속 알리테아의 모습은 이후 방에 있는 제피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결국 그 모든 이야기는 알리테아의 이야기다. 


알리테아는 남편 잭(피터 베르토니)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했지만 유산을 겪는다. 이후 두 부부는 소원해지고 잭은 새로운 여성을 만나 알리테아를 떠나간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과 잭 사이의 이야기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진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그녀와 잭 사이에 생긴 일과 묘하게 겹쳐진다. 사랑으로 시작해 아픔으로 끝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애써 거부하던 그녀는 진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리고 아픔을 마주 보고 성장하며 극복한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알리테아는 결국 진을 사랑하게 되고 첫 번째 소원을 빈다. 그렇게 둘은 사랑을 하고 함께 런던으로 온다. 그러나 도시의 온갖 소음은 진을 불편하게 한다. 결국 진은 서서히 죽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남은 소원을 진을 위해 사용하며 그와 이별한다. 그녀 스스로 이야기를 끝낸 것이다. 그러나 잭과의 이별 후 이야기의 끝을 선언하고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던 알리테아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는 성장한 모습을 보이며 진과의 끝난 이야기 속에서 겁먹지 않고 진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녀는 진에 대한 책을 쓴다. 이 책은 어린 시절 그녀가 썼던 엔조의 이야기와 겹다. 혼자 엔조라는 상상의 친구를 만들었던 어린 알리테아는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의 친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불태워 없앤다. 그러나 어느새 훌쩍 자란 그녀는 마찬가지로 현실과 동떨어진 친구 진을 기억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그렇게 막을 내린 그 둘의 이야기는 그녀의 기억으로 전설이 돼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영화는 저 멀리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진을 보여주며 생명을 얻은 이야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영화의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오프닝 시퀀스 속  내레이션은 ‘아주 먼 옛날’로 시작한다. 그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란 이 영화 속 알리테아와 진의 이야기다. 알리테아의 기억으로 생명을 얻은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의 현재가 인간이 금속 날개를 이용해 하늘을 날고, 물갈퀴를 이용해 물속을 헤엄치던 시절로 불리는 먼 훗날의 시점까지 살아남아 전달돼 전설이 된다. 


조지 밀러는 이야기에 대한 이 흥미로운 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허구의 이야기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모두에게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는 영화는 러닝 타임이 끝났음에도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상영되며 살아 숨 쉬고 전설이 된다. <3,000년의 기다림>이 메타 영화처럼 보이는 이유다. 


영화 속 진의 존재는 알리테아가 직접 허구라고 언급한 엔조와 겹치기에 그녀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알리테아가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기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인생을 살며 겪는 우리의 실제 이야기든, 허구로 체험한 영화 속 이야기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고, 그렇게 이야기는 전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과 영화는 영원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임스 카메론이 엿본 시네마의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