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쓴이의 생각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남들에게 글을 보여줄 때 부끄럽고 쑥스러운 감정이 자연스레 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으면 내 생각을 온전히 정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 조금씩 글을 쓰고 있었다. 취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햇수로는 입사 3년 차인 내가 부쩍 느끼는 것은 '글을 적지 않으니, 생각이 깊어지지 않고, 생각이 깊어지지 않으니 내가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라는 것인데, 이대로 가다가는 너무나도 1차원적인, 오로지 '돈'이 목적인 인생밖에 될 것 같지 않아 다시 글을 조금씩 쓰기로 결심했다. 글의 최종 정착지가 어디일지는 모르겠으나 보람되고 느끼는 바가 있는 과정이 되길 바라며 첫 번째 글을 써본다.
모든 것이 개개인에게 최적화로 맞춰지고 있는 사회이다. 코로나 19가 헤집고 간 2년이라는 시간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파편화, 개인화되는 사회로의 진입을 더 빠르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데이터는 우리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관심 있으며, 싫어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보는 것만 계속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계속 들을 수 있게 세팅하고 있다. 당장 유튜브만 들어가도 나에게 최적화된 장르만 피드에 올라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세상을 구축하고 그곳에 성을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존중해달라.'라는 말을 표출해가며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수많은 세상이 만들어진 지금의 사회 속에서 각자는 자신의 세상이 전부인 양, 다른 세상은 인정하지를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 자신의 세상에서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타자의 세상은 절대로 배척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조되어야 할, 사라져 버려야 할 그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온 침대보다 키가 크면 남는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늘려버리는 방심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자신의 세상이 절대적 기준인 것 마냥 타인의 세상을 그곳에 맞춰버리려고 한다. 이런 시도는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나 정치, 사회면의 기사의 댓글을 구경하자면 대부분이 화가 나 있다. 자신의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타인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자신이 공고히 쌓아 올린 성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아야 하며, 아니 금이 가서도 안되며, 타인의 성은 스스럼없이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듯하다. 나는 지금 한국 사회의 큰 문제는 점점 커져가고 있는 이념 간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주의처럼 거창한 이념 간의 갈등이 아니라 파편화되었지만 획일화시키려 하는 아이러니한 행동이 만들어낸 갈등 말이다. 인내심, 이해, 배려가 바닥난 상태라고 보인다. '나도 널 존중할 테니, 너도 날 존중해줘.'가 아닌 '일단 나를 존중해줘 봐.'의 상태.
너무도 많은 프로크루스테스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프로크루스테스의 마지막은 어땠는가. 그가 사용했던 살인의 방식에 의해 그도 목숨을 잃었다. 언젠가 그 침대에는 자기 자신이 올라가 있을 것이다.